조국통일범민족연합 범민련 남측본부

함께읽는글

 
  [칼럼] [오늘을 열고 내일을 바꾸는 역사 산책] 아! 38선
  
 작성자 : 범민련남측본부
작성일 : 2014-09-18     조회 : 677  
 첨부파일 :  역사산책_132호.hwp (25.5K) [19] DATE : 2014-09-18 17:17:08


아! 38선


해방정국의 민심


1946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의 기사에 따르면, 1946년 8월 미군정청 여론국이 8,453명에 대해 여론조사를 하였는데, 당시 민중들은 사회주의 체제를 지지한다는 여론이 70%였고, 자본주의, 공산주의를 지지한다고 응답한 이들은 각 14%, 7%정도였다고 하였다.


1947년 7월 3일 조선신문 기자회가 서울시내 10곳에서 2,495명에게 가두설문조사를 했는데, 정권형태에 대해서 인민위원회는 71%, 종래제도에 대해서는 14%가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국호에 대해서는 조선인민공화국이 69.5%, 대한민국이 24.6%의 지지를 보였다. 토지개혁방식에 대해서는 무상몰수 무상분배 68%, 유상몰수 유상분배 17%, 유상몰수 무상분배 10%순으로 나타났다.


1946년 당시 38도선 이남의 인구는 대략 1,220만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회원수는 57만4,000명,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 회원수는 331만3,000명, 조선부녀총동맹(여맹) 맹원수는 80만명, 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 맹원수는 65만6,000명이었다. 이를 모두 합하면 534만명(이남 인구의 약 44%)을 웃도는 규모로서 일제와 미군정의 야만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대중조직화의 규모와 기세는 가히 대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45년 9월 9일 미군정이 시작되고 포고령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인민공화국은 일정한 정부의 기능을 하고 있었고, 인민위원회는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예컨대 경북 영양군의 경우 군민의 80%가 인민위원회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영양군 인민위원회는 군내 극빈자를 위해 쌀을 구입할 수 있는 돈 170만원①을 거두었다 한다.(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


9월 9일, 미군정의 등장은 한반도 영구분할통치의 서막
“미군정의 활동과 일치하지 않는 모든 진보 민주세력을 금지한다.”


미군정(재조선 미육군사령부 군정청)은 1945년 9월 7일 설치되었다.
재조선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은 병력 9만 7000명을 인솔하여 9월 8일 상륙작전을 방불케하는 대규모 군사작전으로 인천을 통해 서울에 들어 와 11월 10일에 제주도까지 미군정 제주지역본부 설치를 완료하였다.


태평양 미 육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하루 앞선 9월 7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38선 이남에 대한 점령정책을 명시한 ‘조선 인민에게 고함’이라는 포고령 제1호를 발표하고 비행기를 동원하여 이남지역에 이 문서를 대대적으로 살포하였다.


『본관(맥아더)은 태평양 미 육군 총사령관으로서....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및 조선 인민에 대한 군정을 펴면서 다음과 같은 점령에 관한 조건을 포고한다.
제1조. 38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최고 통치권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 시행된다.
제3조. 모든 주민은 본관 및 본관의 권한 하에서 발표한 일체의 명령에 즉각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군에 대한 반항행위 또는 공공의 안녕을 교란하는 행위를 감행하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엄벌에 처할 것이다.
제5조. 군정 기간에 있어서는 영어를 모든 목적에 사용하는 공용어로 한다. 영어 원문과 조선어 또는 일본어 원문에 해석 또는 정의가 불명하거나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영어 원문을 기본으로 한다.
제6조. 앞으로 모든 포고, 법령, 규약, 고시, 지시 및 조례는 본관 또는 본관의 권한 하에서 발포될 것이며, 주민이 이행해야 할 사항들을 명기하게 될 것이다.』(발췌 및 밑줄은 인용자)


그리고 포고령 2호(45.9.7)에는 ‘포고명령을 위반하는 조선인은 미군정청 법정에서 사형 등의 엄벌에 처하겠’다고 초법적인 선포를 하였다


그렇다! 이렇게 미군은 처음부터 조선의 독립이나 법치실현은 안중에도 없이 오로지 점령군으로서 무소불위의 통치력을 선포하였다.
조선말과 글을 말살하고 황국의 언어를 강요했던 일본과 마찬가지로, 총독에게 반항하는 일체의 불령선인에게 무자비한 형벌을 가했던 일본제국주의와 똑같이, 최고통치권의 장악으로 조선민족의 자주권과 일체의 정치를 부정하고 조선인을 자기들의 군화발 아래로 무릎꿇을 것을 강요했던 강도일제와 똑같은 식민점령군으로 스스로를 공표하며 군정이라는 이름의 식민통치를 개시한 것이었다.


이 때 일제 총독부는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에 통치권을 이양하고 있었고, 총독부 건물에는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었다. 그러나 비밀리에 도착한 미군 선발대가 ‘미군이 진주하기 전까지 모든 체제를 변경하지 말고 계속 유지하되, 정식 항복할 때 일본통치기구를 그대로 미군에게 인계하라’고 통고하였고, 조선총독부는 8월 18일 건준에 행정권 이양을 취소한다고 통고하는 동시에 건물에 게양되었던 태극기도 다시 일장기로 바뀌었다.


1944년 8월 10일에 여운형의 주도로 결성된 ‘건국동맹’은 1945년 8월 1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로 확대 전환되었고, 9월 6일에는 건국준비위원회가 개최한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건국을 선언하고 정강과 강령을 발표하며 조선인민공화국 정부(인공)를 출범시키고, 9월 8일에는 내각을 발표하여 건국 준비는 의미있게 전개되고 있었다②.


9월 4일 미육군 24군단장이며 재조선 미군사령관인 하지 중장의 명령통고는 미국의 관점과 의도를 극명하게 증언해 준다. “조선인들은 미국의 적으로 규정되며 따라서 항복에 부수되는 모든 조건을 이행할 의무를 지니는 한편, 일본인들은 우리의 우호국민으로 간주한다.” 미국은 일본인을 구하고 조선을 점령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9월 9일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항복 조인식을 하고, 총독부 건물에 게양되어 있던 일장기는 성조기로 교체되었다. 일제의 식민통치권을 그대로 인수받아 발빠르게 점령통치업무를 공식 개시한 미군정부는 10월 10일에 군정장관이 ‘38선 이남에는 미군정부만이 있을 뿐이며 그 외에는 어떤 정부도 존재할 수 없다④’고 선언하였다.


인민공화국의 주석으로 임명된 이승만은 10월 16일 귀국한 후 10월 23일에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하고 조선인민공화국 반대 입장을 내고 주석 취임을 거부했다. 마침내 미군 정부는 인공은 물론 임시정부 모두 부정함으로써, 진보세력은 탄압의 대상으로 되고, 보수우익 친일세력들은 미군정부와 함께 민족분단의 매국매족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국무성에서 파견된 정치고문 베닝호프가 미군 상륙후 1주일만에 번즈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문은 미국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그대로 드러낸다. “서울의 정치상황에서 가장 고무적인 단 하나의 요소는 장년층과 유식층 중에서 수백명의 보수주의자들의 존재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일본에 협조했던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 같은 낙인은 궁극적으로 지워질 것이다.”


아! 38선


독일과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고 있던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루스벨트, 처칠, 장개석)에서 ‘적절한 시기의 조선 독립’을 결정했으며,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에서 이를 재확인하였다. 45년 2월에는 얄타회담(미, 영, 소)에서 독일 항복 이후 2~3개월 안에 소련이 대일 전쟁에 참전할 것을 합의하였다. 얄타회담에서는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 실시 문제가 동의된데 따라, 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국의 번즈, 영국의 베번, 소련의 몰로토프가 회동하여 ‘조선임시정부 수립과 미영중소 4개국에 의한 5개년 이내의 신탁통치 실시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은 미국의 왜곡과 사주에 의한 좌우대립의 격화로 49년 9월에 이르러 결국 무산되고 만다.


8월 9일 참전한 소련은 빠른 속도록 만주를 장악하고 조선반도 북부까지 진입했다.

미국은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미국으로서는 일본의 항복을 빨리 받아내기 위한 방법이었던 동시에 원자폭탄만 있으면 한반도 단독점령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여하튼 원폭투하는 소련이 이미 함경북도까지 진출한 상황에서 더 이상 남진⑤을 막고, 조선반도를 미국의 점령계획을 차질없이 강행하려는 군사적 시위의 성격이 지배적일 수 밖에 없었다.


38도선으로 조선땅을 두 동강난 것에 대해 반공우익세력은 미국을 해방자요 은인이라고 신봉한다. 소련이 함경도에 들어온 직후인 1945년 8월 11일 새벽 2∼3시 사이 미군 대령 딘 러스크가 거의 단독으로 38선을 그었는데, 소련이 파죽지세로 내려오고 있는 때에 미국이 38선을 확정하지 않았다면 이남마저 공산화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38선은 소련의 남진팽창을 막기 위한 미국의 저지선이며, 이는 전적으로 미국의 정치군사적 필요에 의한 것이었음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독점령이든 분할점령이든 결국 미국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69년간 분단의 고통과 희생을 철저히 강요해 온 것이다.


2차세계대전 종결이 임박한 시점에 이미 미국은 국무부와 군부에 의해서 조선분할 점령계획을 준비하였으며 이는 포츠담 회담(45.7.26)의 밀약을 통해 실행에 옮겨 졌다. 러스크 대령의 상관이었던 작전국장 존 에드윈 헐 중장이 1949년에 발언한 ‘증언 기록’에서 “38선은 포츠담회담에서 마련됐다⑦”고 밝히고 있다. 소련의 대일 참전이 논의되기 전부터 대소전진 군사적 요충지로서 한반도의 선제적 장악이 동북아 패권 구도속에서 진행되어 왔던 것이다.


이렇게 통한의 38선은 1945년 9월 2일 확정되었다.


한편, ‘조선인민에게 주는 붉은군대 포고문’(1945.8.20)을 낸 소련군은 일본군 지휘관과 행정책임자를 상대로 무장을 해제하고 조선총독부의 개입을 배제했다. 또한 이미 조직되고 있는 각 단위 인민위원회에 행정권을 바로 넘겨주었고, 이북지역에서는 친일잔재 청산에 바로 착수하게 되었다.


‘해방된 조선인민 만세!’로 끝을 맺는 소련군의 ‘치스차코프의 포고문’은 이러하였다.


“조선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연합국 군대들은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구축했다. 조선의 행복도 조선인민이 영웅적으로 투쟁하며 꾸준히 노력해야만 달성할 수 있다. 조선인민 자체가 반드시 자기의 행복을 창조하는 자로 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 노동자들이여! 노력에서의 영웅심과 창작적 노력을 발휘하라!


조선 사람의 훌륭한 민족성 중의 하나인 노력에 대한 애착심을 발휘하라! 진정한 사업으로서 조선의 경제적 및 문화적 발전에 대하여 고려하는 자라야만 모국 조선의 애국자가 되며 충실한 조선사람이 된다.”


38선에 대한 일본의 오랜 야망


패전에 봉착한 전범국 일본의 손익계산서는 ‘조선땅에서 소련과 미국이 격돌하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치선(즉 분단선)을 확정하고 이러한 역관계를 어부지리로 이용하여 종전후의 재기를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38선의 확정과 1950년 전쟁은 일본의 예상대로 패전의 잿더미에서 빠른 국가재건의 결정적인 기회로 작용하였다. 때문에 일본은 1945년 4월에서 6월까지 스위스에서 미국 전략사무국의 앨런 덜레스를 접촉해 ‘조건부 항복’ 가능성을 타진했는데, 일본이 강점한 한반도와 대만을 일본 영토로 유지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완전승리와 한반도 분할을 계획하고 있었던 미국이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전무하였다.


역사적으로 한반도를 분할하려는 일본의 시도는 매우 끈질기게 전재되어 왔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반도 분단은 식민통치라는 일본의 역사적 죄악행위로부터 비롯됐다.’는 조동걸 교수의 주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통한의 세월을 넘어 <우리민족끼리>의 시대로


8·15광복은 국내외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바친 민족적 저항의 승리였다.
그러나 8·15광복은 미소열강의 다툼속에서 결국 민족분단으로 이어졌다. 미국과 소련은 독일의 항복과 일본의 패전이 있기 전부터 이미 조선반도 분할에 대한 의견을 상호 은밀히 도모하고 있었으며, 미국은 소련의 대일참전이 있기 전 서둘러 원자폭탄을 투하해 조선반도의 단독점령을 시도하기 까지 하였다.


미국은 카이로, 포츠담 회담의 합의를 백지화했음은 물론, 미군정을 통해 민족분열을 부추키고, 친일인사들은 그대로 온존시킨 반면 민족적 진보세력에게는 가공할 탄압을 가하면서 정세를 왜곡조작하여 결국 이남단독정부를 수립하고야 말았다.


45년 8월말에 전국적으로 이미 145개의 건국준비위를 갖추고 있었다.
건준은 중도세력과 공산계열까지를 포함하고, 이념적으로도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평등에 기초한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새로운 민족민주적 권력으로서의 잠재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친일우익세력과 분열패권적인 공산계열이 협상의 주도권, 건국노선을 둘러싸고 분열과 대립을 일으키고, 한편에서는 미군정에 대한 절충적이고 타협적인 조류들로 인하여 스스로 건준을 무력화시키고 만다.


38선은 미 제국주의의 침략인 동시에 민족분열의 결과이다.

분단 70년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 6.15, 10.4공동선언이 안겨 준 <우리민족끼리>의 정신과 원칙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구현하려는 대단합의 기개, 실천의 기풍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때이다.


<우리민족끼리>의 정신은 민족자주의 정신이며, 이는 외세배격으로 실현된다.
<우리민족끼리>의 정신은 민족단합의 정신이며, 이는 6.15, 10.4선언의 철저한 이행과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적 운동으로 실현된다.


분단의 고통과 비극, 분단으로 인한 민족의 대결은 더 이상 그 어떤 이유로도 지속되어서는 안된다.
사상과 제도의 차이를 뛰어 넘어 서로를 존중하며, 유무상통하며, 가까운 시일안에 민족공동의 주권을 세우고 번영을 이루는 날을 반드시 열어 내자.


--------------
1. 48년에 쌀 1가마니 가격은 300원이었다. 당시 최고권액은 100원이었고, 해방직전 조선 전체 통화략이 50억 정도였다고 한다.
2. <민족분단과 통일문제>, 김병오
3. 중도 보수적 민족주의자들은 조선인민공화국 참여를 거부하고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며, 9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을 반대하는 국민대회준비위를 9월 7일에 개최했다. 발기인은 송진우, 김성수, 장택상, 김준연, 서상일 등 330여명이었다. 인민공화국이 내각을 구성하자 9월 8일에는 한국민주당 발기인 1,000여명의 이름으로 조선인민공화국 타도 성명서를 발표하였으며, 9월 16일에는 한국민주당이 정식으로 출범했다. 이남의 건국세력은 조선인민공화국(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세력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어져 건국노선이 전면 대립하게 된다. 인공에 참가했던 세력들은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집결한다.
4. 하지 성명 이후 인밈공화국은 1945년 10월 정당으로 탈바꿈했으며, 11월에는 군소단체들을 통합해 조선인민당으로 개편하였다.
5. 일본의 조선병탄은 미국과 일본의 공모합작품이었다. 미국은 카쓰라태프트 밀약(1905.7), 미국무장관과 주미 일본공사간의 각서 교환(1908.11)을 통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권을 용인해 주었다. 미국은 태평양 진출을 위해 필리핀이라는 식민기지를 구축하고, 일본으로 하여금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도록 한 것이다. 미국의 교활성과 폭력성은 동북아 지배과정에서 나타난 오랜 침략적 특성이다.
6.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완범 교수(정치학)의 저서 ‘삼팔선 획정의 진실’(지식산업사, 2001년) 서울대 사회학과 신용하 교수도 1988년 논문 ‘한국 남북분단의 원인과 포츠담 밀약설’에서 “한반도 분단이 포츠담회담에서 밀약됐다”고 제기한 바 있다.
7. 역사에 드러난 일본의 조선반도 분할 점령 기도
   ① 일본-명 : 대동강 할지론(1592.9) : 임진전쟁(1592~98)으로 일본은 평양까지 침공하지만, 명나라 참전으로 수세에 처하자 소서행장이 일본과 명이 평양을 경계로 평양 이북은 명에 귀속시키고 평양 이남은 일본에 귀속시키는 조선 분할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의 격한 반발과 항의와 명의 거부로 일본의 평양할지론은 무산됨. 청, 러시아는 조선을 일본저지를 위한 전초기지로 간주하게 됨.
   ② 일본-명 : 조선 4도 할지론(1593) : 임진전쟁에서 일본은 조선 남부로 퇴군하며 재차 명에게 조선의 경기도, 혹은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의 조선 4도의 할양을 강화 조건으로 요구하며 한반도 남부의 점거를 시도하였다. 일본의 조선 4도 할지론은 실패하였고 일본은 조선 남부의 무력 정복과 한성으로의 북상을 시도하여 정유년 전쟁(1597~98)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③ 청-일본 : 한반도 공동점령안 (1894) : 조선을 탐내던 청일간의 대결이 격화되자 영국은 청과 일본에 한반도 공동 점령안을 제의하여 일본은 서울과 인천에서 한반도 남부로 물러나고 청은 아산에서 한반도 북부로 물러난 후 중립지대를 두고 한반도의 남북 분할을 제안하였다. 영국의 한반도 공동 점령안을 청은 수락하였으나 조선 전체를 장악하려는 일본이 거부하여 무산된다.
   ④ 일본의 39도선 분할 제안(1896.5) 잠정타결 :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러시아에게 39도선을 경계로 39선 이남의 일본 차지와 39선 이북의 노서아 차지를 제안하여 곡창지대, 부산, 원산, 마산 등의 전략적 해군기지를 장악하려 함.
   ⑤ 러시아-일본 39선 분할론(1900~1903) : 조선분할 잠정타결후 일본은 영일동맹(1902)을 업고 만주-한반도 교환을 요구하며 공세를 취하자 러시아는 39선 분할론을 제시하면서 39선 이북의 중립지대화를 제안했지만 일본은 조선 전체점령을 노려 러시아의 제시를 거부하고 한반도와 만주로의 진출을 시도하여 러일전쟁(1904-05)을 일으킨다.
   ⑥ 일본-미국의 남조선 할지론 :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강제합병하였다(1910.8.29.-1945). 2차세계대전에서 패배가 확실해진 일본은 식민지 잔류를 희망하는 화평공작을 전개. 막판에는 경성을 포함한 한반도 남부의 영유를 요청하여 최후까지 한반도를 고수하려고 노력하였다.


 
 
TOTAL 12
[칼럼] [오늘을 열고 내일을 바꾸는 역사 산책] 1946년의 교훈
1946년의 교훈 조선민족은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원하였고, 미군정과 친일파는 분단을 강행하였다①. 1946년은 분단과 전쟁을 막고 자주통일국가의 조속한 수립을 위…
Name: 범민련남측본부  |  Date: 2014-11-14  |  Hit: 600
[칼럼] [들술날숨] 내 인생은 나의것! 주인답게 살고 싶어요
내 인생은 나의것! 주인답게 살고 싶어요 인생의 목적을 한마디로 정의하기에는 참 쉽지 않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인생관에 따라 다르기 때문입…
Name: 범민련남측본부  |  Date: 2014-11-14  |  Hit: 579
[칼럼] [오늘을 열고 내일을 바꾸는 역사 산책] 아! 38선
아! 38선 해방정국의 민심 1946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의 기사에 따르면, 1946년 8월 미군정청 여론국이 8,453명에 대해 여론조사를 하였는데, 당시 민중들은 사회주의 체제를 지지한다는 여…
Name: 범민련남측본부  |  Date: 2014-09-18  |  Hit: 678
[칼럼] [들숨날숨]어떻게 굽든 맛있기만 하면 된다?
어떻게 굽든 맛있기만 하면 된다? 회식자리에 자주 등장하는 음식을 손꼽으라 하면 아마도 삼겹살이 으뜸이 아닐까 합니다. 사시사철 계절에 관계없이, 장소를 불문하고, 남녀노소 가리…
Name: 범민련남측본부  |  Date: 2014-09-18  |  Hit: 626
[칼럼] [오늘을 열고 내일을 바꾸는 역사 산책] 매국과 굴욕으로 얼룩진 『한일국교정상화』
한미일 전쟁삼각동맹의 서곡 – 매국과 굴욕으로 얼룩진 『한일국교정상화』-  1965년 6월 22일!박정희정권은 경술년의 국권강탈 강제합방보다 더 치욕스럽고, 36년간의 식민노예보…
Name: 범민련남측본부  |  Date: 2014-07-17  |  Hit: 765
[칼럼] [들술날숨] 사람은 흔히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듣는다
  『사람은 흔히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듣는다.』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시골에서 농사짓는 영희네 아버지는 딸이 5명 있습니다.큰 딸은 영순이, 둘째 딸은 일순이, 셋째…
Name: 범민련남측본부  |  Date: 2014-07-17  |  Hit: 719
[칼럼] [오늘을 열고 내일을 바꾸는 역사 산책] 역사적인 <4월 남북연석회의>를 되돌아본다
역사적인 <4월 남북연석회의>를 되돌아본다 작년에 이어 올 봄도 여지없이 전쟁의 위기가 오락가락하고 있는데요, 한편에서는 전쟁연습에 대북제재니 소란을 피우면서 한쪽에서는 …
Name: 범민련남측본부  |  Date: 2014-06-07  |  Hit: 753
[칼럼] [들숨날숨] 말걸기
말걸기 누군가에게 말걸기를 하는 것은 어떤 이유가 있을 때 하게 됩니다.무엇인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뭐가 필요한지 그 사연과 욕구는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을 거구요.자녀에게 말걸기…
Name: 범민련남측본부  |  Date: 2014-05-29  |  Hit: 819
[기고] 민족자주통일비 건립 12주년을 맞으며
민족자주통일비 건립 12주년을 맞으며   금년으로 이곳 중부대학교 만인산 태봉 자락에 민족자주통일비를 건립한 지 12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에게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참으로 …
Name: 범민련남측본부  |  Date: 2014-04-30  |  Hit: 720
[기고] 범민련 탄압은 7.4, 6.15 합의를 부정하는 반통일 범죄행패
    [기고] 범민련 탄압은 7.4, 6.15 합의를 부정하는 반통일 범죄행패 - 민주세력 총단결로 반인권 반통일 공안몰이 짓부수자 권오헌 민가협양심수후원회명예회장 &n…
Name: 범민련남측본부  |  Date: 2013-08-02  |  Hit: 2944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