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애국열사 이구영

1920-2006

본문

[ 약력 ]

1920년 3월 24일 충북 제천 한수면에서 출생 

1925년 6세에 한문 공부를 시작

1935년 결혼

1938년 영창학교에 입학하여 3년 만에 졸업

1942년 황한의학원에 입학 

1943년 합천독서회 사건으로 1년간 수형 생활

1948년 동양의학전문학교에서 강사 생활

1950년 9월 북으로 넘어감

1958년 7월에 남으로 내려왔다가 9월에 부산에서 체포

1980년 5월 가석방으로 출소

1984년 ‘이문학회(以文學會)’를 창설

1998년 제천시 문화상 수상

2005년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

2006년 10월 20일 오전2시 별세

[ 생애활동 ]

호는 노촌(老村)이다. 선생은 1920년 3월 24일, 충북 제천 한서면에서 명문가인 연안이씨 가문의 종손으로 태어난다. 그는 조선 중기 4대 문장가 중 한 분인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선생의 13대 종손이며, 부유한 집안에서 한학을 공부하며 자랐다. 선생의 집안은 지역의 명문가로,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 의병부대에 참여한 조부 운강(雲岡) 이강년(李康秊) 등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선생은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 선생께 사사를 받은 한학의 대가이며 서예의 대가이다.

 

선생은 1938년 서울 영창학교에 입학하며 신학문을 접하고, 1942년 황한의학원에 입학하여 한의학을 공부한다. 1943년 합천 독서회사건으로 1년여의 옥고를 치르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선생은 해방 후 동양의학전문학교에서 강사생활을 하던 중 1950년 9월 북한으로 넘어간다.


선생은 영창학교를 입학하면서 일본어판 〈빈보 모노가타리 (가난이야기)〉라는 책을 접하면서 사회주의운동에 뛰어든다. 독립운동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고향 친척벌인 벽초 홍명희선생 등으로 부터 신학문의 영향을 받았다. 이후 그는 핍박받는 조선민중들의 해방을 위한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선택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1950년 한국전쟁 중 월북하였으며 전쟁 후에는 한의학을 통해 의료활동을 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기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또한 김일성주석 앞에서 연암 박지원등 실학사상을 강론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한국전쟁후 선생은 1958년 7월 통일사업을 위해 남으로 내려왔다 접선에 실패하고 그해 9월 부산에서 체포되었는데 이때 선생을 검거한 경찰은, 일제치하 고향 제천의 지서를 습격했을 당시 자신을 체포했던 악명 높은 순사였다. 선생은 22년의 긴 옥고를 치르고 1980년 출소한다. 대전교도소 시절 한방에서 지내며 신영복, 심지연등에게 한학과 서예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선생은 장장 22년의 옥살이를 마치고 옥중에서 착수했던 한말 제천 지방의 의병 사적 정리를 마무리하는 한편, 1984년 한학 연구모임인 이문학회(以文學會)를 창설하여 열성적으로 이끌어 왔다. 선생이 편역한 〈호서의병사적(湖西義兵事蹟)〉은 한말 의병사 연구에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문헌이 되었고, 이와 같이 의병사 연구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선생님은 1998년 제천시 문화상을 수상하셨다. 그리고 독립기념관에 의병 관련 자료를 기증한 데 이어 다시 제천시에도 무려 6천여 점의 귀중한 자료를 기증하여 2006년 7월 제천시 장락동에 성대하게 건립된 의병도서관에 소장되었다.


선생은 이문학회(以文學會)에서 한문, 역사 등의 강의를 통해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번역 및 집필에 몰두하였다. 이문학회(以文學會)라는 뜻은 ‘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어짊을 돕는다(以文會友 以友輔仁)’는 논어(論語)의 글귀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이문학회에는 시인 신경림, 소설가 최인석 등 문인과 신영복 교수와 심지연 경남대 교수 등이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자서전〈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수필집〈연행만초(燕行漫草)〉, 역서로는〈저한집(樗軒集)〉,〈이강년선생문집(李康秊先生文集)〉,〈호서의병사적(湖西義兵事蹟)〉등이 있다. 또한 선생의 제자들인 이문학회 회원들이 스승의 한시(漢詩) 200여 편과 산문 50편을 모아 〈한 겨울 매화 향기에 마음을 씻고〉라는 제목의 개인 문집을 출간하였다.


선생은 비운의 삶에도 불구하고 낙관적인 역사관을 잃지 않았다. 선생은 울긋불긋 꽃향기에 취하기보다는 찬 겨울 매화 향기에 마음을 씻으며 평생을 신념대로 올곧게 살아왔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두루 섭렵하며 자신의 사상을 혁신한 선생을 가리켜 감옥 제자인 신영복 교수는 "노촌 선생이야말로 진정한 선비"라고 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선생은 2006년 10월 20일 향년 86세로 별세하였다. 유족으로 남과 북에 각각 1남2녀, 1남1녀를 두고 있다.


"모든 사람이 다함께 잘 살 수 있어야 옳은 세상"


"내가 처음 세상을 알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리고 모든 사람이 다함께 잘 살 수 있어야 옳은 세상이라고 믿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나는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내가 알고 있고 느끼는 만큼 세상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약속을 어려운 고비마다 다짐해왔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어떠한 곳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앞에 놓인 길이 아무리 멀고 먼 길일지라도 그것이 가야할 길이라면 사람들이 모두 잠든 밤중에라도 깨어 일어나 그 길을 가겠노라는 약속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한다. 

지금까지 나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해왔다. 나의 젊음도 바쳤고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힘든 짐을 지우기도 했다. 내가 노력해 온 결과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미미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이 나라의 밑바닥 어디쯤에선가 숨쉬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나날도 변함없이 그 길을 걸어가고자 한다."


(「찬 겨울 매화 향기에 마음을 씻고」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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