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애국열사 신창균

1907-2008

본문

[ 약력 ]

1908년 충북 영동 출생

1919년 12세의 나이로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일제경찰에 체포

1940년 중국으로 망명 이후 중경임시정부 마카오 연락책으로 독립운동

1945년 해방 직전 입국, 일제에 구속

1945년 8월 16일 해방 후 석방

1945년 사회민주당 중앙집행위원

1946년 한국독립당(당수 김구) 중앙집행위원, 연락부장, 재정부장,  재정위원장, 상무위원 (∼1950)

1948년 4월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한국독립당 8인 대표(김구, 조소앙, 조완구, 엄항섭, 신창균, 김의한, 조일문, 최석봉) 일원으로 방북, 김일성 북조선인민위원장(당시)과 단독회담

1949년 백범 김구 임시정부 주석 국민장 장례 실무 총책임자

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옥고

1961년 통일사회당 총무 및 정책심리의장

1973년 민추협 서울특별시 대표위원

1983년 민족통일촉진회 회장

1988년 민족자주통일협의회 고문

1990년 전국민주민족운동연합(전민련) 공동의장

1990년 범민족대회 예비회담 남쪽 대표단장

1990년 범민련 남측본부(준) 공동의장(문익환, 신창균, 백기완)

1991년 제2차 범민족대회 남측 단장

1992년 제3차 범민족대회 남측 단장

1992년 전국연합 고문

1992년 민주개혁민주정부수립 국민회의 공동의장

1993년 범민련 남측본부(준) 상임고문

1994년 제5차 범민족대회 상임본부장(대회장)

1995년 범민련 남측본부 상임고문(고문단장)

1995년 4.19혁명상 수상

1996년 제7차 범민족대회 대회장

1997년 안기부법과 노동법 무효화 범국민대책위원회 고문

1997년 6월 민주항쟁 10주년 사업 범국민추진위원회 고문

1997년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 제8차 범민족대회 대회장

1998년 백범 서거 50주기 추모공연위원회 위원장 (∼2000)

2001년 6·15 남북공동선언 1주년 기념 민족통일대축전(금강산) 주석단 공동대표

2001년 사단법인 백범정신실천겨레연합 수석 공동대표

2002년 제7회 늦봄통일상 수상

2004년 제1회 백범정신실천상 수상

2005년 3월 5일 운명, 충북 음성 선산에 안장

[ 생애활동 ]

호는 송암(松岩)이다. 1908년 충청북도 영동(永同)에서 신철수, 박토분씨의 집안에 장남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면서 학문을 익히셨다. 1919년 3월 12살의 어린 나이에 3·1운동에 참가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나이가 어려 매만 맞고 풀려났다. 이때 선생의 내면에 뿌리내린 민족자존 의식이 한평생 독립운동, 통일운동으로 이어졌다.

 

1922년 대전제일보통학교 3학년 때는 항일 동맹휴학의 주동자로 무기정학을 당하였고, 1926년 6월 10일에는 조선의 마지막 왕인 융희황제 장례일에 전국 6.10독립만세와 동맹휴학을 주동하셨다. 

1930년 충북사범학교(청주 소재)를 여러 번 퇴학의 고비를 넘기면서 졸업한 후, 청주, 음성, 충주 등지에서 10년간 교편을 잡았다. 특히, 음성초등학교 재직 7년 반 동안 근무하는 중에는 당시 초등학교로서는 희귀한 강당을 건립하였으며, 음성읍 초등학교운동장을 확장을 단행하였고, 현재의 음성대운동장을 신설 건립하였고 한다. 申昌均 先生의 訟德碑文 중에서(2003년)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민족사관을 교육함으로 인해 요시찰 인물로 주목되어 결국에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1940년 6월 중국으로 망명해 충칭[重慶]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마카오 연락책으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제공하고, 중국 내 일본군의 움직임을 보고하는 일을 하였다.


1945년 해방직전 귀국하여 일제에 구속되어 수감 중 해방 후 감옥을 나왔다. 해방 후 선생은 ‘남북통일이 없으면 우리 민족은 진정한 독립을 이룬 것이 아니다’라는 백범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광복 뒤 선생은 한국독립당(한독당)의 중앙집행위원을 맡았다.


1948년 4월 선생은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기 위한 남북협상을 위해 백범과 함께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북조선인민위원장과 단독 회담을 하기도 하였다. 이후에 백범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이승만 정권에게 사업체를 뺏기고 정치 활동이 묶이는 가시밭길을 걸었다. 


1949년 김구(金九) 주석 국민장 장례 실무 총책임자를 거쳐, 선생은 평화통일정책에서 백범을 계승한 조봉암을 도와 진보당 재정위원장을 맡았다. 1959년 7월 ‘진보당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선생은 5·16 군사 쿠데타가 발발하자 혁신계 인사로 분류돼 수감된 후 선생은 반독재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길을 걸었다.


1983년 민족통일촉진회 회장, 1988년 민족자주통일협의회 고문을 거쳐 1990년에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공동의장으로서 조국통일범민족대회 예비회담 남측 대표단장을 맡았다. 같은 해 범민련(범민련) 공동의장을 맡은 이래, 해마다 범민족대회를 이끌었다.


그 밖에 민주개혁민주정부수립 국민의회 공동의장(1992), 8·15민족통일대축전 주석단 공동대표(2001), 백범정신실천겨레연합 수석 공동대표(2001), 범민련 명예의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2005년 3월, 98살로 숨을 거둘 때까지 통일운동에 힘썼다.


저서로는 회고록 《가시밭길에서도 느끼는 행복》(1997)이 있고, 4·19혁명상(1995), 늦봄통일상(2002), 백범통일상(2004) 등을 받았다.

[ 활동사진 ]
[ 추모단체 ]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서울시 중구 서애로5길 12-21 수송빌딩(필동3가) Tel. 02-712-8603 Fax. 02-717-8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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