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애국열사 정만진

1940-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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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

1940년 2월10일 만주 흑룡강성 출생

1958년 3월 대구대학 법학과 입학

1961년 2대악법반대 경북학생공동투쟁위원회 위원장

대구대학 민족통일학생연맹, 민주민족청년동맹, 민족자주통일협의회 

1961년 5월16일 혁명검찰부 대구4.2데모사건(징역 10년 선고)

1964년 8월 1차 인민혁명당 사건

1963년 한일회담반대시위 주도

1969년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경상북도지부 참여

1972년 민주수호경북(대구)협의회 준비위원, 청년위원장 활동

1975년 4월 8일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징역 20년 자격정지 15년 선고

1982년 3월2일 형 집행정지 특별사면

1988년 민자통대구경북협의회, 영남대민주동문회의장, 전국대학민주동문회의장, 사월혁명연구소

1998년 8월4일 대구 가야기독병원에서 운명. 경남 창녕군 대합면 정영리 선산  

[ 생애활동 ]

선생은 대구대학 법학과에 재학 중 장면정부의 2대 악법(반공법, 데모규제법) 제정시도를 무산시키기 위해 2대악법반대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구속되어 복역 중, 

5.16쿠데타로 혁명재판소에 이관되어 징역10년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4.19 이후 민주민족청년동맹, 민족자주통일협의회 활동에 참여하였고, 소위 ‘1차인혁당’사건에도 연루되어 수배된 바 있다.

출소 후 1963년 대학에 복학한 후 경북대 이재형, 김성희, 여정남 등과 함께 한일회담반대시위를 주도하였고, 

1969년 삼선개헌반대투쟁시는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경상북도지부’에 참여하고, 

1972.4.22. 민주수호경북협의회의 11인 준비위원회의 1인으로서 민주수호경북협의회의 발기에 참여하였고 청년위원장으로 적극 활동하는 등 지속적으로 민주화운동을 해왔다.

1969년 7월경 대구에서 이재문, 하재완 등과 접촉, 당시 이재문의 학교후배로서 학생운동으로 수배받고 있던 여정남을 도피시키기 위해 친구 하재찬의 형인 하재완의 집에 가정교사로 가장 입주시키는 등, ‘민청학련’ 시까지 대구경북지역의 선후배와의 인적 연계 속에서 학생운동을 지원해 온 활동으로 인하여, 

1975. 4. 8. 대법원에서 대통령긴급조치위반, 국가보안법위반 등으로 징역 20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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