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애국열사 강희남

1920-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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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 


1920년 1월 13일 전북 김제 농가 강학용 공과 류성녀의 장남으로 태어나다. 

1935년 초등학교 졸업 후 한문수학 및 독학의 길로 접어들다. 

1935년 정복님과 결혼 후 예수교에 입교하고 슬하에 3남 4녀를 두다. 

1947년 한국 신학대 입학하다. 

1950년 익산에서 중학교 교사로 부임. 

1952년 군산 영명 중학교사로 전임. 

1955년 군산교회에서 목사로 안수받다. 

1959년 몇 교회들을 거쳐 전주 영생 중고등학교 교감으로 부임 3년 경과. 

1963년 전주 성광교회를 비롯하여 난산교회 등 목회에 전념. 

1977년 난산 교회 시무중 박정희에게 도전하다가 전주감옥에 투옥되어 1980년 초에 출옥. 

1977년 전주 감옥 당시 서울에서 (당시 문익환목사도 함께 있었음) 윤보선씨 량일동 이희호 여사 등 10 여명이 내려왔으나 면회를 못하고 돌아갔다 함. 

1977년 9월 광주 고법 첫 공판일 서울에 윤보선 선생 내외 등 1천여명의 방청객들 몰려오니 재판을 

       연기하는 바람에 경찰과 안기부 직원들과 더불어 민중 난투극이 벌어져 부상자가 났음. 

1979년 전주에서 장남 세현군이 항소해서 광주로 오니 강목사는 즉시 대전으로 이감됨. 

1980년 초 대전에서 출옥 

1983년 문익환 목사와 민통련을 창립하고 대의원총회 의장에 취임. 이 해에 아내와 사별. 

1983년 기독교 농민회 이사장을 겸하여 4년을 지내다. 

1987년 전북대강연으로 2차 투옥되어 전두환의 호헌조치 반대 옥중단식투쟁에 들어가 40여일을 지내다. 그해 6월 민중항쟁으로 출옥하다. 

1988년 조성만 열사 장례위원장을 맡다. 

1990년 저서 ‘역사속의 실존’을 출간. 

1991년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 위원장 직무대행을 맡다. ‘령성과 해방’을 번역 출간.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 조문시도 사건으로 3차 투옥 

1995년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 취임(초대의장). 범민련 관계인사 29명과 함께 투옥 됨. 4차 투옥 

1996년 저서 민중주의 출간 

1999년 명동성당에서 4개월 동안 농성 투쟁. 

2000년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 사임. 동년에 몇몇 동지들과 련방통추, 양키추방 공대위 결성하다. 

2003년 저서 ‘동북3성을 가다’(력사기행)을 출간하다. 

2004년 독일 동포들 초청강연으로 유럽행을 떠나다. 

2005년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 이라크 파병 저지운동으로 목포에서 서울까지 도보행진 시위를 강행. 

2006년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철폐를 위해 연방통추 양키추방 공대위를 7개월 동안 천막농성투쟁 을 강행. 

2006년 용산 양키기지 앞과 양키대사관 앞 양키추방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하다. 

2008년 저서 ‘정리된 상고사’를 출간. 코리아 21연구소 파리포럼 처음으로 2차 유럽행을 떠나다. 

2009년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납골당에 안장

[ 생애활동 ]

55년 군산교회에서 목사 안수, 목회 활동 중 77년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다 투옥되었다. 민통련 활동, 기독교 농민회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87년 호헌조치 반대 옥중 단식투쟁을 하였다. 

범민련 남측본부 활동 중 여러차례 옥고를 치르며,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한 활동에 헌신하던 중 이명박정권에 대한 민중항쟁을 주장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 활동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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