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애국열사 계훈제

1921-1999

본문

[ 약력 ]

1921년 12월 31일 평안북도 선천군 심천면 부황동에서 아버지 계봉집과 어머니 이형저 사이의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남

1936년 신성학교 입학, 1936년 졸업

1943년 경성제국대학 입학. 학생 징용을 거부하고 임시정부를 찾아가다가 체포

       평양근교 승호리의 시멘트공장에 강제 징용. 조선민족해방협동당에 가담하여 항일 활동

1945년 환국한 임시정부의 선전부에서 활동

1946년 서울대학교 법문학부 편입

       서울대학교 건설학생회, 이북학생총연합 등을 조직하여 학생운동에 앞장섬

1948년 대한노총인천지구연맹 조직

1949년~59년 폐결핵과 늑막염으로 투병

1950년대 말 ‘진보당’ 사건으로 위축된 운동진영을 복원시키기 위해 노력하면서 4.19시기에 학생운동의 대부로서 그리고 사회운동가로서 직간접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

1960년 4.19혁명에 참여, 교원노조 결성, 교원노조 서울지역 중앙위원, 국학대 강사

1962년 함석헌, 장준하 등과 ‘자유언론수호협의회’ 결성

1963년 한일굴욕외교 반대투쟁

1968년 월남파병반대운동

1969년 삼선개헌반대투쟁위 상임운영위원

1970년~1979년 〈씨의 소리〉 편집위원

1971년 민주수호국민위원회 운영위원

1973년 충남 아산의 구화고등공민학교(이사장 함석헌)의 교장을 1년 동안 맡음

       12월 유신헌법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 전개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10여일 동안 구금

19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

1977년 민주주의국민연합 운영위원

1978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

19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수배되어 2년여 도피생활

1982년 포고령 위반,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관련 투옥

1984년 민주통일국민회의 부의장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

1986년 민통련 의장대행

1987년 민통련의장 대행으로 6월항쟁을 선언한 성공회대회를 주도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 자주민주통일국민회의 공동의장

1991년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 부위원장

1991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상임고문

1995년 고 장준하 선생 20주기 추모행사 준비위원

1999년 3월 14일 별세. ‘민주사회장’으로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

[ 생애활동 ]

“저항은 가장 신성한 권리이자 의무다” 선생의 삶은 그의 말처럼 ‘저항’으로 일관했다. 선생은 일본제국주의와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투쟁, 민족 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운동에 한 평생을 보냈다.

선생은 1921년 평안북도 선천군 심천면에서 농사꾼의 5형제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압록강을 넘나들던 독립군의 모습을 지켜보며 민족의 현실에 눈을 뜬 그는 임시정부로 갈 계획으로 국경을 넘다 일본 헌병에 붙잡혀 지원병 훈련소로 압송됐다.

그 뒤 평양 근처 채석장에서 중노동을 하면서 ’민족해방협동단’이란 항일운동단체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했다.

1945년 해방되자 고 장준하선생의 권유로 백범 김구 선생 밑에서 일을 했다. 백범의 영향 아래 신탁통치 반대투쟁에 나섰고, 백범의 남북협상을 지지하며 삭발을 하기도 했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 때는 ‘국대안 반대투쟁’을 이끌었다. 

선생은 5·16 쿠데타가 일어난 뒤 민주화운동의 가시밭길을 걷기 시작한다. 3선개헌반대투쟁위 상임위원, 「사상계」 편집장, 민통련 부의장을 지내며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앞장섰다. 이 과정에서 3차례나 투옥됐고, 1980년에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1년 3개월 동안 도피생활을 했다. 

그 후에도 민통련 의장, 전국연합 상임고문 등을 역임하여 한반도의 혁명적 변화와 민주화를 위해 젊은 시절부터 평생 동안 투쟁을 계속했다.

고 문익환 목사와 함께 재야의 상징으로 해방의 등불로서 역할을 하던 선생은 지난 1995년 고문 등으로 얻은 지병인 폐질환이 악화돼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산소호흡기에 의지하면서도 나라를 먼저 걱정하던 선생은 병상에서 자서전 〈나의 투쟁, 나의 일생〉을 집필하기도 했으나 끝내 마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일생동안 단 한차례도 구두를 신지 않았고, 넥타이도 매지 않았으며 항상 흰 고무신에 작업복으로 민주화운동 현장을 누볐던 옷차림이 말해주듯 선생은 저항정신과 청렴성, 도덕성의 상징이었다.

[ 활동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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