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애국열사 임동규

1939-2020

본문

[ 약력 ]

1939년 1월 10일(향년 81세) 전남 광산군 본량면 탑동마을 출생

1946년 본량초등학교 입학

1952년 광주서중학교 입학

1955년 광주제일고등학교 입학

1959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입학

1959년 서울대 재학시절에 농촌문제에 관심을 가져 서울대 농대생 이우재 등과 함께 ‘남산농촌사회연구회’에서 활동함. 

1960년 서호연, 이우재, 홍갑표, 신재억 등과 함께 ‘구농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협업농장운동을 전개함. 

1960년 서울대학교 향토개척단 활동

1962 ‘학사주점’ 동업

1964년 인혁당 사건으로 조사받음. 

1968년 통일혁명당(약칭 통혁당) 사전으로 조사받음. 

1971년 박현채와 함께 ‘대중경제 100문100답’ 집필

1961년 농업근대화연구회 사무국장으로 서울농대 김문식 교수, 이대 법대 최병욱교수 등과 함께 연구활동 및 후진 양성함. 

1975년 세계정도술협회 사무국장

1976년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 총무부장(총간사)

1979년 3월 통일혁명단 재건위원회(약칭 통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지정관, 김재욱, 양정규 등과 함께 체포되어 무기징역형받음.

1979년 남한사회주의민주전선 준비위원회(약칭 남민전) 사건(소위 남민전 인민무력부장)으로 무기징역형받음(쌍무기수).

1980년대 감옥에서 무예도보통지 4반무예 복원작업, 빗자루도사 (문익환 목사, 김하기 소설 등 증언)

1988년 12월 20일 석방(9년 9개월)

1989년 7월 1일 민족무예도장 경당(총관장)과 우리무예연구회(회장)를 창립하여 ‘체육으로서의 무예만이 아니라 민족학의 연구, 인격교육’을 통하여 오늘의 국제화된 사회에서 뚜렷한 주체의식과 민족적 긍지를 갖춘 민족간부의 양성을 목표로 활동하였으며, 당시 전국 150개 대학 중 100여개 대학에 경당 동아리가 결성되었으며, 운동권 학생의 생활총화로서 무예수련이 활용되었고, 전국에 250명의 사범과 10만명이 넘는 수련생을 배출해옴(1989~현재).

1990년『한국의 전통무예』를 학민사에서 출판함. 

1991년 『무예사연구』를 학민사에서 출판함. 

1992년 5월 민족무예도장 경당 이전(광주시 광산구 탑동마을)

1994년 동학100주년 기념행사에 경당사범 및 수련생 100명이 1주일간 참가해서 동학군과 관군의 전투를 재현함. 

1994년 사단법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특별분과(위원장 임동규)로 24반무예 참가함. - 1996년 『무예도보통지(실연․주해)』를 학민사에서 출판함. 

1998년 사단법인 한국전통무예총연맹 창립 및 고문 엮임. 

2000년 사단법인 한국전통무예총연맹 주최로 노르웨이, 덴마크 등을 방문해서 전통무예세미나를 개최하여 24반무예를 유럽 태권도 사범 및 수련생들에게 최초로지도함.

2000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광주전남지부 의장

2001년 8월 평양축전 방북단 일원으로 북한방문, 방북 목적에 없는 회의 개최 혐의(북한방문 국가보안법 위반(잠입.탈출 등))로 구속 기소돼 1심에서 징역 2년6월 및 자격정지 2년6월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기각되었으며, 2008년에 대법원파기환송심에서 징역 1년6월 및 자격정지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함. 

2002년 사단법인 24반무예경당협회 총재로 취임함. 

2007년 사단법인 한국전통무예총연맹 주최로 미국에서 전통무예세미나를 개최하여 24반무예를 미국 무예사범들에게 최초로 지도함.

2014년 대장암수술, 요양병원 생활

2014년 대한민국 무예명인 패 및 인장 수여(한국무술총연합회) 

2019년 남민전 관련 대법원 재심청구에서 무죄 판결 받음.(명예회복)

2020년 9월 21일(월) 오전10시 50분 운명

[ 생애활동 ]

임동규 선생은 1960년대와 70년대에 서울대 향토개척단, 구농회, 농업근대화연구회,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등 당시 농민, 노동 등에 관심을 갖고 활동을 했으며, 1979년에는 남민전 및 통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쌍무기수를 받아서 10년간 복역. 1989년에 민족무예도장 경당 및 우리무예연구회를 조직해서 문무를 겸비한 민족간부 양성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2000년에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광주전남 의장으로 활동하셨습니다. 2002년에 (사)24반무예경당협회 총재로 취임해서 24반무예의 전국화와 세계화에 전념하셨습니다. 또한 민족통일운동가로서 분단시대를 극복하고 민족문제의 큰 과업인 통일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삶을 헌신하신 애국자이셨습니다.


임동규 선생의 삶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더욱더 역사적인 삶을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1939년 2월 19일에 전라남도 광산군 본량면 지산리 탑동마을에서 출생. 본량초등학교, 광주서중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59년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입학했다. 서울대 재학시절에 농촌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서울대 농대생 이우재 등과 함께 ‘남산농촌사회연구회’에서 활동하였으며, 서호연, 이우재, 홍갑표, 신재억 등과 함께 ‘구농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협업농장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서울대학교 향토개척단을 만들어서 본격적으로 농촌문제 해결을 위해 대중운동을 시작하였다. 1962년에는 당시 농촌문제 및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토론하였던 ‘학사주점’을 운영하기도 하였습니다.

 

1964년에 인혁당 사건으로, 1968년에는 통혁당 사건으로 조사를 받았으며, 대중경제론의 기초가 되었던 ‘대중경제 100문 100답’을 박현채 선생과 함께 집필하기도 하셨습니다. 이후 농업근대화연구회 사무국장으로 서울농대 김문식 교수, 이대 법대 최병욱 교수 등과 함께 연구활동 및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1970년대에는 단순한 체육인 아닌 무예인으로서의 실사구시의 민족운동을 하기 위해 세계정도술협회 사무국장을 맡아서 정도술 보급에 애썼다. 또한 조선시대 정조대왕에 의해 편찬된 국방무예교범인 ‘무예도보통지의 24반무예 중 권법, 곤방 등 일부 무예를 복원하는 일을 정도술 달인이었던 안길원 선생과 함께 하였다.


또한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 총무부장을 맡아서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였으며, 1979년에 통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지정관, 김재욱, 양정규 등과 함께 체포되어 무기징역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남민전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또 선고받는 등 유사 이래 처음으로 쌍무기수가 되었다. 약 10년간 감옥에서 보내면서 ‘무예도보통지 24반무예’ 복원작업에 매진하였으며, 문익환 목사님께서 “빗자루도사”라는 별명을 지어 부르기도 하였다.


1988년에 민주화의 열풍으로 석방되었으며, 1989년 7월 1일에 민족무예도장 경당(총관장)과 우리무예연구회(회장)를 창립하여 ‘체육으로서의 무예만이 아니라 민족학의 연구, 인격교육’을 통하여 오늘의 국제화된 사회에서 뚜렷한 주체의식과 민족적 긍지를 갖춘 민족간부의 양성을 목표로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당시 전국 150개 대학 중 100여개 대학에 경당 동아리가 결성되었고, 운동권 학생의 생활총화로서 무예수련이 활용되어 공안당국이 긴장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전국에 250명의 사범과 10만명이 넘는 제자를 배출해왓다.


1990년에 『한국의 전통무예』를, 1991년에 『무예사연구』를, 1996년에는 『무예도보통지』를 발간하셨으며, 1992년에는 민족무예도장 경당을 자신의 고향인 광주 광산구 탑동마을에 이전을 해서 본격적으로 고구려의 상무정신과 조선의 선비정신을 잇는 ‘문무겸전의 민족간부’를 양성하는 데 노력하였다. 1994년에는 동학100주년 기념행사에서 경당사범 및 수련생 100명이 1주일간 참가해서 동학군과 관군의 전투를 재현하였으며, 1994년에 사단법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특별분과위원장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한국전통무예총연맹 창립 및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2000년대에 노르웨이, 덴마크, 미국 등을 방문하여 전통무예세미나를 개최하여 24반무예를 최초로 지도하였다. 2002년에 사단법인 24반무예경당협회 총재로 취임하셨으며, 24반무예 문화재 지정 및 훈련원 복원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2005년에 무예도보통지 워크숍 및 24반무예 시범을 국회의원회관에서 무예단체 최초로 시범을 보였으며, 한일전통무예교류회를 2008년부터 전무총 산하 무예원로와 일본 무예원로들과 함께 2년에 한 번씩 개최함으로써 무예를 통해 한일 간의 교류와 화해협력을 이끌었다.


또한 민족운동과 통일운동에도 매진하셨습니다. 2001년 8월에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광주전남 의장으로서 평양축전 방북단 일원으로 북한을 방문하였으며, 방북 목적에 없는 회의 개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구속 기소돼 1심에서 징역 2년6월 및 자격정지 2년6월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기각되었으며, 2008년에 대법원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1년6월 및 자격정지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되었다. 2012년에 대장암수술을 하고 요양병원에서 투병생활을 8년 넘게 하였다. 2014년에 대한민국 무예명인 패 및 인장을 수여(사단법인 한국무술총연합회) 받았으며, 2019년에는 1981년 간첩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한 대법원 확정판결로부터 38년만에, 재심 청구 이후 5년 만에 서울고법 형사12부(재판장: 홍동기 부장판사)에서 무죄판결을 함으로써 명예를 회복하셨습니다. 2020년 9월 21일에 폐렴 및 폐혈증으로 별세.


임동규 선생은 서울대 상대출신으로서 안락한 삶을 추구할 수 있었지만, 당시 남북의 분단구조를 타파하고 민족해방의 전선을 구축하고자 하였으며, 빈곤한 농민과 노동자의 삶을 외면하지 않았다. 외롭고도 힘든 삶을 선택하였다. 이론적 틀을 구축하고 실천으로서 증명하고자 하였다.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의 신념을 실하기 위해서 남민전의 전사로 활동하였으며, 주체의식과 민족적 긍지를 갖춘 민족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조선의 국방무예인 무예도보통지의 24반무예를 복원하고 민족무예도장 경당을 설립해서 250명의 사범을 양성하고 10만명이 넘는 대학생과 시민들에게 검을 쥐게 하고 통일을 외치게 하였다.


1979년에 남민전과 통혁당재건위 사건에 연루되어 ‘쌍무기수’라는 전대미문의 타이틀을 군사독재정권이 새겨주었지만, 임동규 선생님은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좌절하지 않았다. 1.5평의 작은 공간에서 빗자루를 들고 24반무예라는 민족혼을 부활시켰다. 임동규 선생님은 굴곡진 역사의 흐름에서 한 치도 비켜서지 않앗다.

[ 활동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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