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애국열사 박정숙

1917-2020

본문

[ 약력 ]

1917.6.18.  강원도 양양 외물치에서 아버지 박장우, 어머니 이씨 두 분의 3녀 중 막내로 출생. 

        대포초등학교 1회 졸업. 여성으로는 첫 졸업생.

        큰언니 영향으로 항일의식과 진보사상을 익히고 해방공간에서 단선단정 반대운동과 여성운동 전개. 

               (큰언니는 일제시기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드나들고, 해방공간에서는 자주통일운동을 하며 

               1948년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석.)

1944.       항일 지하활동을 하던 언니와 형부가 연행. 박정숙 선생 또한 체포

1948.       중앙여맹(조선민주여성동맹)에서 활동. 이때 나이 32세

1949.       전남여맹조직이 드러나면서 중앙여맹까지 화를 당하고, 박정숙 선생은 최고 책임자로 지목되어 고문을 당함

1950.       아버지를 제외한 가족들이 모두 북으로 가게 됨

1951.10     전쟁시기 남북을 오가며 활동

1952.2.    국방경비법으로 10년형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 수감. 옥고를 치르면서 모진 고문을 당함

1960.10.    4.19혁명으로 감형, 석방, 이때 나이 44세. 가족도 머물 곳도 없는 터에 공안당국의 감시와 통제가 계속 이어짐.

1960.11.   사회당준비위원회 여성위원회 참여 활동.

1961.5.16이후 ‘사회당 최백근 사건’에 연루, 6개월간 감옥생활 후 출소

1962.       감옥에서 연을 맺은 8살 아래인 김선분 선생을 다시 만나 언니·동생 사이로 그리고 평생의 동지로 동고동락하며 생활.

1963.        만화가게를 비롯한 궂은일을 하며 고난의 삶을 살아옴.

1972.7.      7.4남북공동성명 발표에 크게 고무받고 옛 동지들과 의기투합.

1975.       소위‘오작교사건’으로 반공법 및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주명순, 박정숙, 김선분 선생을 비롯한 11명이 체포, 2년간 옥고를 치름.

1992.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회원으로 활동.

1993.       범민련 남측본부 준비위원회 활동.

1995.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에 참가.

1995.11.    범민련 대탄압시 범민련 사수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함.

1996.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으로 활동.

2000.       통일광장 회원으로 활동.

2001.11.    김선분 선생과 제7회 불교인권상 수상.

2001.6.15~16 6.15 공동선언 발표 1돌 기념 민족통일대토론회 대표단(금강산)

2003.       김선분 선생과 함께 장례비용으로 마련해놓은 기금 전액을 범민련 남측본부에 기부.

2005.7.15.~17. 범민련 남측본부 후원회 주관 금강산 통일기행 참가.

2005.10.    광복 60년 기념 평양문화유산 참관차 평양행.(평양, 묘향산 등 참관. 김선분 선생과 함께 4박 5일)

2008.5.22.  범민련 남측본부 후원회 주관 개성 민족유산 답사.

2011.       건강악화로 입원치료, 요양 등을 반복하며 투병생활

2011.7.16.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갈현동모임 주최로 박정숙,김선분 선생 동고동락 60년 기념 후원모임

2015.8.1.   양심수후원회, 통일광장, 범민련 남측본부 등 주최로 서울 수유리 한 식당에서 ‘통일할머니 박정숙 선생 백수 축하 잔치’ 

2015.8.4.   평생 동지로 동고동락하시던 김선분 선생 간경화 등 숙환으로 별세

2020.10.2. 오후 10시40분경 남양주 새봄요양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 향년 104세.

[ 생애활동 ]

선생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6월 18일 강원도 양양 물치리 어촌에서 가난하게 살던 세자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물레방앗간을 꾸려 어렵게 지내는 환경이었지만 대포초등학교 1회 졸업생이 되셨고 항일 지하활동을 하시던 큰언니따라 서울에 올라와 6년제 보통학교를 졸업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항일민족의식과 진보적 사회의식이 남달랐던 큰언니의 정신적, 실천적 영향은 그 뒤 선생님의 조국사랑의 한길을 걷는 자양분이 되었다.


1945년 조국광복을 맞아 당시 의식 있는 누구나가 그러했듯이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이란 과제를 현실로 받아 안아 민주여성동맹 활동을 하였고 특히 1948년 이승만과 미군정의 단선·단정에 반대하는 홍보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큰언니는 1948년 4월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여성단체 대표로 북행을 하였으며 공안기구의 감시를 받아오던 선생은 1949년 여맹활동과 관련 체포되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온갖 잔혹한 고문을 당하고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요시찰 대상으로 감옥 아닌 감옥생활을 이어갔다.

1950년 전쟁시기 선생은 여성동맹원으로 활동하시다가 1차 교육대상자로 선발되어 북으로 가시어 교육을 받았고, 1951년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어머님을 극적으로 만날 수도 있었다. 그때 어머님으로부터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고, 아버님은 가혹한 고문 끝에 거리에 내던져 숨을 거두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때 딸 둘을 찾아 북행길에 오르시던 어머님하고 마지막 이별이 되었다.


1951년 10월 선생님은 남행길 김포에서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형확정 판결을 받고 복역하던 중 1960년 4.19혁명 덕에 10년 옥고를 마치고 풀려나게 되었다.


선생은 감옥생활 10년은 말 그대로 죽음과의 싸움이었다고 회상하였다. 행형당국의 학대는 말할 것도 없고, 단 한 번 그 누구도 면회 한 번 온 일이 없었으며, 내복 한 벌 없이 얼음장 같은 겨울 감방을 살았다.


선생은 수소문하여 함께 옥고를 치렀던 선생보다 1년 뒤 감옥을 나오신 김선분 선생을 찾았고, 이때부터 두 분 선생은 2015년 김선분 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60년 가까이를 한지붕, 한이불 속에 동거동락을 하였다


두 선생은 우선 의식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갖 궂은일들을 다 하였다. 다행히 1963년 만화가게를 하면서 그런대로 같은 일터와 잠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판잣집가게는 추위와 더위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겨울이면 발이 시려워 연탄난로에 돌을 올려 놓았다가 밤이면 발밑에 달궈진 돌을 깔고 추위를 이겨냈다고 회상하였다.


이러한 고된 삶과 공안당국의 빈틈없는 감시속에서도 선생들의 자주통일염원은 식을 수가 없었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은 큰 감동과 함께 민족자주와 대단결에 대한 희망으로 가슴 부풀게 했다. 그리고 유신파쇼를 반대하는 뜻있는 동지들과의 의기투합과정에서 1975년 다시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선생이 다시 민주화운동과 통일투쟁현장에 나오신 것은 신군부독재에 맞섰던 광주민중항쟁 이후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이 이어지면서 마침내 6월민중항쟁과 함께 자주통일투쟁이 본격화된 때였다. 그 과정에서 많은 청년, 학생, 노동자, 농민, 민주인사들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특히 수십년을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조국통일에 대한 정치적 신념과 양심을 지켜오고 있던 비전향장기수들의 석방과 후원을 목표로 했던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발족과 활동에 선생께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옥중동지였다는 연대감과 무엇보다 자주통일에 대한 한결같은 염원으로 양심수후원회 활동을 하시면서 어려운 살림에 아껴놓았던 귀한 생활비를 거침없이 후원회에 내놓았다. 1992년 무렵이었다.


선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7.4남북공동성명 정신에 따라 조직된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결성에 함께 하고 1995년 범민련 남측본부 대탄압 때는 하루에도 수없이 압수수색을 해대는 범민련을 지키는데 거의 독보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1999년 비전향장기수들이 모두 풀려나고 2000년 9월 2일 63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의 신념의 고향, 조국과 가족품으로 송환되는 과정에서 비전향장기수들의 모임인 통일광장 성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렇게 선생은 민주화운동, 학생운동, 노동운동 무엇보다 자주통일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치열했던 범민족대회, 민가협 목요집회, 96년 연대항쟁, 효순·미선이 학살의 분노의 현장, 평택미군기지건설반대를 위해 90노구를 이끌고 황새울 들판을 휘젓는 분투를 하였다.


그러나 분노하고 치열했던 활동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한 투쟁성과 헌신성으로 2001년 불교인권상을 받았고, 2001년 금강산 ‘남북해외 통일대토론회’에 함께하였으며, 2005년 광복60돌기념 평양문화유산답사차 평양, 묘향산 등을 다녀왔다. 2011년 양심수후원회, 갈현동모임 주최로 박정숙, 김선분 선생 동거동락 60년 기념 후원모임도 있었다.


선생은 2011년 이후 노약하심에 따른 낙상과 기억장애를 겪으면서 요양원과 요양병원에 입원하였지만 통일염원만은 식을 줄 몰랐고 방문객들에게 오히려 힘과 용기를 주시도 하였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 사회의 정의, 평화와 우리 민족의 자주통일에 대한 신념은 더욱 철저하였다.


[ 활동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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