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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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쟁일지 ]
1월 20일 윤이상 「범민련 해외본부」 의장, ‘마음속의 휴전선부터 허물자’고 호소 [1천만 해외동포에게 드리는 글]
1월 23일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 결성
준비위원장 : 문익환 목사
부위원장 : 윤영규(「전교조」), 권종대(「전농」), 박순경(여성), 계훈제(사회), 전대협의장(학생)
준비위원 : 165명(단체규모에 따라 배정, 선임된 인원)
실행위원장 : 이창복(전민련 상임의장)
부실행위원장 : 김희선, 김쾌상
실행위원 : 17명(주요 부문단체 대표 및 영남 호남 중부 서울권 각 1인 등) 
참가단체 : 전민련, 「전농」, 「전교조」, 전빈협, 민주당 등 31개 정당, 사회단체, 개별인사
1월 24일 재경 실행위원 전원이 관할 경찰서로부터 범민련활동 즉각 중지, 불응하면 구속한다는 경고를 받음. 이창복 실행위원장과 김희택 실행위원은 연행, 구속되고 권형택은 수배됨.

2월 1일 문익환 준비위원장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회담제안서 발송
2월 23일 문익환 준비위원장이 2차 노태우 대통령에게 회담 제안서 발송

3월 7일 북 3대단체(「조선직업총동맹」,「조선농업근로자동맹」,「조선학생위원회」), 남의 「전노협」,「전대협」,「전청협」 등 4개 단체에 ‘남북사회단체대표회담’ 제의

4월 2일 북 전금철(조평통 부위원장), 범민련 베를린 3자회담 사건 공판의 증인 참가 희망
4월 11일 고려대생 1천여 명, ‘남한의 유엔 단독가입 반대’ 결의[구국투쟁 선포식 및 학원탄압 규탄대회’
4월 12일 「범민련 일본지역 본부」의장(양동민).사무처장(김정부), 범민련 재판증인으로 입국하려다 주일 한국영사관에 의해 입국 거절당함
4월 12일 「전대협」, 북「조선학생위원회」에 남북 해외청년학생들이 참가하는 ‘국토순례대행진(8.2-8.10)’과 ‘청년학생통일대축전(8.14)’개최를 제안하고 이를 위해 7월7일 판문점에서 실무회담 갖자고 제의
4월 13일 「전민련」, 「전대협」, ‘통일운동 탄압분쇄 결의 및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전진대회’ 개최
4월 15일 「전민련」.「전대협」.「반핵평화운동연합」.「민중당」.「한반도 평화를 위한 평화 군축협의회」 등 5개 당체, ‘남북한 동시 핵사찰’ 촉구 [공동기자회견]

5월 6일 북 조선학생위원회, ‘전대협의 통일대축전 개최 제의’ 동의

5월 22일 재야, <한반도 비핵지대화를 위한 1천인 선언>에서 4개항 요구 주장

6월 6일 통일일꾼 수련회 개최(약 80여 명 참가). 문익환 위원장 재수감
문익환 위원장이 재수감 됨에 따라 비상 실행위원회에서 선임된 ‘강희남 위원장 직무대행’을 추인함
6월 19일 베를린 3자회담 대표 조용술 목사 ‘석방 환영 모임’을 고려대학 강당에서 가진 후 ‘준비위원 비상총회’를 개최.
총회에서는 범민련 결성대책과 ‘91 2차 범민족대회’추진에 대해 논의하고 탄압국면 이후 소속단체의 사정에 따라 직무이탈, 유고된 부위원장 윤영규, 권종대, 계훈제 대신 신창균, 조용술, 전창일을 선임.
6월 25일 한국전쟁 희생자 위령제 및 반전 반핵 평화월간 선포식
6월 29일 ‘제 1차 준비위원회의’ 소집

7월 2일 북 「조선학생위원회」, 「전대협」이 제의한 ‘남북해외청년학생통일축전’문제를 남측 대표들과 협의하기 위해 북측 학생 대표 3명을 7월7일 판문점에 파견한다고 발표
7월 8일 ‘서울지역 대학신문 기자연합 방북취재를 위한 준비위원회’(약칭 : 서대기련), 북 「조선학생위원회」와의 예비실무회담을 위한 방법 등 이북 주민접촉 신청 절차문제 협의[통일원방문]
7월 11일 「서대기련」, 30명으로 공동기자단을 구성하여 8월11일부터 10일간 방북 취재활동할 예정이라고 발표
7월 19일 통일원, 「서대기련」의 북한 주민접촉 신청 승인 
7월 24일 통일방안 합의와 ‘조국의 평화.민족대단결을 위한 남.북.해외동포 청년학생통일대축전’ 성사를 위한 3자 실무회담 대표단,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에 관한 남.북.해외 청년학생 공동성명서>발표 (독일 베를린)
7월 27일 반전반핵 평화옹호 범민족 걷기 대회 진행. 「범민련」 간부가 당국으로부터 소환장 받음

8월 3일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토종단 대행진’ 시작
8월 4일 「전대협」, 전국 국토 순례대행진 발대식
8월 5일 「전대협」 대표 박성희(경희대), 평양도착
8월 6일 신창균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 집행위원장, 정부에 ‘통일대행진 행사’와 ‘범민족대회 행사’의 일원화 방안 협의제의. ‘한라선봉대’(「전대협」 소속 대학생 50여 명), 한라산 백록담에서 출정식
8월 7일 「전대협」 방북대표 박성희, 백두산에서 시작된 ‘조국통일촉진 백두.한라 대행진’ 참가  
8월 10일 「전대협」 대표 성용승(건국대), 평양 도착
‘91 서울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 “현정권이 범민족대회 준비를 방해,탄압하면서 ’통일대행진‘을 이북측에 제안한 것은 대회를 무산시키려는 저의로밖에 볼 수 없다”며 “정부는 범추본 간부들에 대한 소환장 발부 등 탄압행위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
8월 12일 남북대학생, 판문점에서 첫 회담. 「서대기련」(의장 김기헌)과 「조선학생위원회」(위원장 최덕헌)대표 각 3명 예비접촉.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제2차 범민족대회’ 개최(경희대), 정부의 불허로 북측대표단 참가 못함
8월 13일 ‘2차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 ‘범민족대회 사수를 위한 결의대회’개최
방북한 전대협 대표 박승희, 성용승, 범민족대회 북측 참가단 6백여 명과 함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 군사분계선을 넘으려 시도
8월 14일 ‘91서울 범민족대회’, ‘통일대축전성사 결의대회’, ‘통일토론회’, ‘91서울범민족회의 전야제’ 등 행사를 통해 북측대표단의 대회참가 허용과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에 대한 탄압중지 등을 정부에 촉구
8월 15일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제2차 범민족대회’ , 서울, 판문점 북측지역, 일본 도쿄에서 각각 분산 개최하고 <공동결의문> 동시 발표
8월 16일 「전대협」 소속 1천여 명, “정부의 이북 및 해외동포 대표단 입국 불허로 무산된 청년학생 정치회담을 박성희, 성용승 대표가 머물고 있는 북쪽에서라도 성사시킬 것”을 결의[통일축전 폐회식]
8월 18일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제2차 범민족대회’ 폐회

9월 16일 「전대협」 대표 20여 명, 한반도 비핵지대화. 남북불가침 선언 채택 등 통일여건 조성에 정치권의 적극적 참여 요청[민주당 및 국회방문]
9월 26일 「전민련」,「전대협」,「전교조」 등 12개 정당, 사회단체, ‘한반도 비핵군축 실현과 전시접수국지원협정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발족하고 정부에 남북한 동시핵사찰 수용, 한미전시접수국지원협정 거부 등 촉구

11월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 달력 제작

12월 13일 남북고위급회담,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서명
[ 범민족대회 ]

1991년 2차 범민족대회 


당시의 정세는 미국의 북에 대한 핵사찰 공방이 시작되었으며 미국과의 방위조약을 재확인하고 주한미군의 지속적 주둔을 역설하며, 미국의 경제개방요구를 수용하는 등 노태우 정권의 사대적이고 민족대결적 책동이 노골화 되어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정권의 통일방안으로 제출되었던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의 허구성을 알려내고,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으로 인한 분단 고착화 기도를 분쇄하는 전민족적 투쟁을 요구하였다.

8월 3일 전민련, 전교조, 전대협등 36개 단체는 '91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 출범식을 갖고 한반도의 평화정착 방안과 구체적인 통일방안에 대한 범민족적인 논의를 목표로 12일부터 18일까지 경희대에서 2차 범민족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노태우 정권은 통일대행진을 제안하면서 범민족대회는 허용할 수 없음을 밝혔고, 북측에서는 범민족대회를 인정하지 않는 현정부의 통일대행진 제의를 거부하였다.

미국과 노태우정권은 범민련 남측본부 준비위원회를 탄압하고 경희대를 봉쇄함으로써 범민족대회로의 결집을 막아나섰으나 통일애국세력은 이를 뚫고 2만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범민족대회를 성사시켜냈다. 특히 전대협 통일선봉대의 국토종단대행진과 남, 북, 해외 청년학생 통일대축전, 박승희, 성용승의 방북투쟁은 국내외 분열주의자들의 반통일적 음모를 무력화시키기에 충분했다. 


범민족대회는 북측대표단 참가의 정부불허로 북측과 해외동포들은 판문점 북측지역. 일본 도쿄에서 각각 대회를 가짐으로써 분산 개최되었다. 그러나 전화와 팩스를 통해 연방제 통일방안에 대한 지지와 남북한 비핵군축을 촉구하는 내용의 공동결의문을 동시에 발표함으로써 남과 북, 해외의 전 민족적 대단결을 세계만방에 과시하였다.

2차 대회는 비핵군축과 연방제 통일방안에 대한 대중적 논의를 본격적으로 추진함으로써 한반도 평화정착 방안과 구체적인 통일방안에 대한 범민족적 논의를 불러 일으켰으며 범민련이 통일운동세력의 조직적 구심으로 잦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남한 내의 핵무기 완전철수, 불가침 선언 채택, 평화협정 체결을 촉구한 투쟁을 전개하고 연방제 통일방안에 관한 그 구체적 내용을 협의할 통일협상회의를 별도로 열자는 데 원칙적 합의를 이룸으로써 2차 대회는 남북고위급 회담을 성사시키는 기폭제가 되고 남과 북의 화해와 불가침에 관한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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