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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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쟁일지 ]

1월 23일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 결성 1주년 기자회견

1월 25일 미국 친우봉사회(AFSC)에서 범민련 남측본부 준비위원장 문익환 목사를 노벨상 후보로 추천


2월 17일 노태우 대통령,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 문건에 서명

2월 19-21일 제 6차 남북고위급회담(평양),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발효

2월 24일 범민련 도쿄모임 참가자 일동, <7천만 겨레가 남북 당국에 보내는 요청문>발표


3월 7일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범국민 투쟁본부’ 가입

3월 11일 재야인사 5백58명 및 국가보안법 위반 재소자 35명 등, 국회에 국가보안법철폐를 요구하는 청원서 제출

3월 11일 ‘국가보안법 철폐 범국민투쟁본부 준비위원’(민변 등 17개 재야단체). 노대통령에게 4개항 공개질의

3월 14일 ‘범민련 의장단 및 사무국장 회의(4월1일-2일)’ 참가를 위한 협조요청 공문을 통일원에 발송(의장단 : 강희남, 신창균, 전창일, 사무국장: 이관복)

3월 30일 ‘범민련 의장단 및 사무국장 회의’ 참석 불허조치와 관련한 기자회견


4월 1일 ‘범민련 의장단 및 사무국장 제 1차 회의’ 일본 도쿄에서 개최. 남측의장단은 정부의 여권발급 불허로 참석치 못했으나 전화와 팩스를 이용한 통신회담으로 참가. 회의에서 <합의서>, <공동결의문>, <남측당국에 보내는 긴급 요청문>, <천만동포에게 보내는 호소문> 등을 채택하고 해외본부에서 제출한 범민련 강령, 규약 초안을 심의함. 강령과 규약 초안은 남측의 요청으로 결정을 유보하고 향후 심도있는 연구와 검토, 폭넓은 합의를 위하여 ‘제3차 범민족대회’에서 처리하기로 결정


5월 8일 「광주전남지역총학생회연합」(약칭 : 남총련), ‘조국의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학생추진위원회’ 출범식에서 태극기. 인공기를 들고 연단 위를 행진.

5월 13일 건국대 총학생회,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민족건대 결의대회’에서 한반도단일기. 태극기, 인공기 함께 게양

북 「조선학생위원회」, 5월 15일 ‘5월 광주성지순례단’ 5백 명을 판문점을 거쳐 남쪽에 파견한다고 통보하면서 남 정부에 신변안전 보장 요구

5월 14일 「남총련」, ‘5.18광주성지순례단 초청사업 환영단 파견대회’, 2백명 규모의 환영단 판문점 파견

5월 30일 「전대협」 산하 ‘조국의 평화와 자주적 통일을 위한 학생추진위원회’, 북 「조선학생위원회」와 ‘남,북,해외 청년학생 통일정치협상회의’개최


6월 25일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범민족특별운동기간(6월25일~8월15일)’선포 기자회견. 통일원에 ‘제3차 범민족대회’ 서울개최에 대한 협조요청 공문을 발송

6월 30일 북 윤기복(범민련 북측본부 의장), ‘제3차 범민족대회와 제2차 청년학생통일대축전에 참가하려는 북측대표단의 판문점 통과절차 협의’를 위한 관계 실무자 접촉 제의


7월 4일 북, ① 국가보안법 철폐 ② 군축실현 ③ 주한미군 철수 및 핵무기 철거 ④ 자유로운 통일논의 보장 등 주장[7.4공동성명 발표 20주년 기념 평양보고대회]

7월 4일 ‘제3차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 구성을 위한 연석회의’ 개최

7월 7일 ‘국가보안법 철폐와 장기수를 포함한 통일인사 석방을 위한 온 겨레 한 끼 단식의 날’ 진행

북「조선학생위원회」(위원장 문경덕),<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문>발표 3주년 기념 학생 집회에서 ① 남북학생회담과 제2차 청년학생통일대축전의 성사 ② 범민족청년학생연합 결성 등을 이루기 위한 남북청년학생들의 투쟁촉구  

7월 9일 「범민련 일본지역본부」, ‘입국보장’ 선언문 발표

7월 20일 ‘제3차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 1차 대표자회의’ 개최

7월 27일 ‘제3차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 2차 대표자회의’ 개최


8월 1일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 결성식

8월 5일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토순례 대행진’ 시작

「전대협」 통일선봉대 소속 대학생 1천5백여 명, ‘통일대축전 선포와 범민족대회 성사를 위한 결의대회’

8월 6일 ‘92범민족대회’관련 행사, 전국 각 도시에서 개최

8월 7일 「대구.경북지역 총학생회연합」(약칭 : 대경총련), ‘국가보안법 철폐 결의대회’ 개최(경북대)

8월 7일 임민식 「범민련」 공동사무국 사무총장 등 범민족대회 해외대표단, ‘제3차 범민족대회(8월12일-17일 예정)’에 참석하기위해 평양도착

8월 12일 ‘통일방안 토론회’ 개최, ‘제3차 범민족대회’ 개막식. 서울(서울대)과 판문점 북측지역에서 각각 진행됨

8월 15일 ‘92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상임본부장 : 강희남, 문정혁)’, 학생, 재야인사 등  2만 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범민족회의‘ 및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약칭 : 범청학련)결성식 개최(서울대)

북,해외, ‘제3차 범민족대회’ 개최(판문점 북측지역 통일각)

8월 16일 「전대협」 소속 학생과 시민 등 1만5천여 명, ‘92범민족대회 보고 및 전대협,범청학련 사수를 위한 시민,학생 결의대회’ 개최 (서울 대학로)

범민족회의 남측대표단(단장 신창균)관계자, 통일선봉대, 전대협소속 대학생 등 4천여 명, ‘통일선봉대 해단식’ 및 ‘92범민족대회 폐막식’개최


9월 14일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 대표자회의’에서 <제3차 범민족대회 남측 평가서> 채택

9월 23일 연세대학교 주최의 ‘통일방안 토론회’에 참가(통일원, 민주당, 국민당 참가)


12월 24일 장기결석 실행위원을 정비하고 강령과 규약 남측 잠정안을 확정함. 

송년모임 개최

[ 공동의장단 회의 ]

1차 범민련 공동의장단회의(1992년 4월 2일, 일본 도쿄)


- 남북사이에 채택된 역사적인 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 적극 환영, 이행촉구

- 민족대단결을 이룩하기 위한 투쟁 강화

- 조국통일방도에 관한 민족적 합의를 이룩하기 위해 적극노력

- 범민련 조직을 더욱 확대강화하고 합법화를 실현하기 위해 적극투쟁

-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제3차 범민족대회를 성대히 치를 것

[ 범민족대회 ]

1992년 3차 범민족대회


방대한 해외의 미군주둔비용과 막대한 무역, 재정적자로 위기에 직면한 미국은 제 3세계 국가에 대한 경제적 침탈의 가속화와 적극적 군사개입으로 무기판매시장의 활기를 되찾는 것으로 그 출로를 찾았다. 이에 미국은 한반도에서 남북사이의 기본합의서와 비핵화 선언의 이행에 노골적으로 개입하고 나섰으며, 노태우 정권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고 나섬으로써 합의서 이행을 계속 지연시키는 엄중한 사태를 야기시켰다.

따라서 한반도를 새로운 긴장상태로 몰고가려는 미국과 이에 동조해 나서는 노태우 정권의 사대매국적 행위를 분쇄하고 남북합의서 이행 요구투쟁을 광범위하게 벌여 나가는 것은 92년 통일운동의 중요한 과제로 나서게 된다. 


3차 범민족대회는 범민련을 중심으로 전국연합 자통위와 전대협, 전청대협 등 자주적 평화통일세력이 각 계층, 부문별로 결합, 범추본을 구성하여 합의서 이행과 비핵군축 실현, 통일방안 합의 확산, 자주교류 확대를 목포로 준비, 주친되었다. 

8월 12∼17일 동안 판문점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제 3차 범민족대회는 당국의 원천봉쇄로 중앙대로 변경하여 개최하고자 하였으나 행사 예정지인 중앙대에 전두경찰이 난입하여 전대협의장 등 지도부를 연행하고 또다시 원천봉쇄함으로써 대회장을 서울대로 옮겨 대회를 진행하였다. 


남과 북, 해외의 범민족대회에 참여한 동포들은 결의문에서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 개의 제도, 두개의 정부에 기초한 연방제 통일방식에 대한 지지를 천명하고 당국의 통일논의 독점을 반대하며 주한미군 철수와 군축 요구 들을 결의하였다. 

또한 거족적인 청년학생조직인 '범민족청년학생연합'이 결성되었고 노동자들이 대오를 갖추어 독자적 집회를 개최하였다. 

이와 같이 3차 범민족대회는 범민련을 중심으로 각계각층에서 대오를 갖추어 참여했으며,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공동의 내용으로 결의문을 채택, 선포함으로써 민족대단결의식을 한층 고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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