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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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쟁일지 ]
1월 13일 「범민련 남측본부(준)」, 제8차 연석회의에서 강령, 규약 남측준비시안 확정. 공동 사무국에 전송

3월 10일 정부, 이인모씨에 대해 조건 없는 이북송환 방침 결정
3월 13일 전국 8개 도시(서울, 부산, 광주, 전주, 대구 등) 학생, 시민 ‘팀스피리트 훈련’ 즉각 중지 촉구 집회

4월 6일 북 김일성주석,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제기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5차회의연설]
4월 10일 「범민련 남측본부(준)」, 서울 종로구 연지동 136-56 한국 기독교 연합회관 9층 13호 임대 계약 체결

5월 10일 「한총련」, 북 「조선학생위원회」에 남북대학간 자매결연 맺기 위한 예비회담을 6월 10일 판문점에서 갖자고 제안
5월 26일 「범민련 남측본부(준)」사무실 집들이
5월 29일 「한총련」김재용 의장, 범청학련 남측본부 의장단 등11명 / 북 「조선학생위원회」허창조 위원장 등 북측대표 6명 / 해외청년 대표 김창오 「재일한국청년동맹」 위원장 등 해외본부 의장단 6명, 국제전화를 통한 3각 회의 방식으로 ‘범청학련 공동의장단 회의’ 개최
5월 29~30일 「범민련」제2차 공동의장단회의, ‘당면투쟁과업’ 및 ‘제4차 범민족대회 서울개최’ 합의(중국베이징)

6월 4일 북과 해외본부에서 강령, 규약에 대한 합의된 수정안을 남측에 전송해옴
6월 11일 「한총련」 조국통일위원회, ‘남북청년학생 자매결연 예비회담’ 6월 12일 강행 결정
6월 12일 「한총련」, ‘조국반도 통일과 남북학생 자매결연을 위한 판문점 예비회담’ 출정식 후 판문점 진출 시도
6월 17일 ‘민간단체 공동대책위원회(‘민변’ 등 9개 단체로 구성)‘ 주최, ‘아시아 국가들의 국가보안법 철폐 관한 심포지엄’(오스트리아 빈) 개최 

7월 6일 「범민련 남측본부(준)」, 탄압국면에서 「범민련」으로부터 이탈된 대중단체들을 재규합하기 위하여 실행위원장 이창복, 실행위원 이현수 공동제의로 현 위원장단 및 실행위원 전원이 시한부(3주)로 일괄 사임하고 대상 대중단체에 재참가 요청서를 발부할 것을 제안하여 가결하고, 임시 집행 수임기구로 전창일을 소집책으로 하는 ‘9인 소위원회’를 구성함.
7월 28일 ‘93 제4차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 결성 준비위원회 확대회의’에서 강희남 전 부위원장(9인 소위원의 한사람)이 7월 30일까지 ‘9인 소위’ 재구성을 못 할 경우, 그 이후에는 ‘9인 소위’를 무효화하고 일괄사임을 철회하고 환원하겠다고 선언. 
7월 30일 ‘조국의 평화와 자주,통일을 위한 4차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결성

8월 6일 「범청학련 북측본부」(의장 허창조), ‘제4차 범민족대회’ 참가 범청학련 북측대표 1백 50명을 8월 13일 판문점 통한 서울 파견 발표 
8월 7일 ‘민족의 화해와 단결을 위한 ‘93범민족대회 국토순례단 통일선봉대’소속 대학생 23명 전북 옥구군 미공군기지에서 연좌농성’
「한총련」, 정부당국의 범민족대회 불허방침과 관련한 기자회견 
8월 10일 「서총련」, 소속 대학생 1천여 명, ‘정부당국에 범민족대회 허용’촉구 [평화정착, 합의서 이행과 범민족대회 성사를 위한 결의대회]
8월 11일 ‘제15차 위원장단 실행위원 연석회의’ 개최. 「범민련」 임원의 백지상태에서 대중단체를 참여시키려 했으나 기한이 10여일이 지나도 하나도 실현되지 않고 일부에서는 8.15범민족대회에서 ‘「범민련」을 해체하고 새로운 통일운동체를 결성하자’는 주장이 나오게 됨에 따라 「범민련」을 수호, 강화하려는 간부들이 모여 「범민련」 구 지도부의 환원선언과 “범민련 깃발 아래 굳게 단결하자”는 결의문을 채택함
8월 12일 ‘93 제 4차 범민족대회’장을 연세대학교로 정하고 집행부가 이동. 당국 「범민련」 사무실을 압수수색하여 서류 일체를 약탈해 감 
문익환 (‘제4차 범민족대회’ 대회장), ‘범민족대회장 원천봉쇄 해제, 대회개최허가’ 요구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8월 14일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 ‘93 제4차 범민족대회’ 개막. 
‘93 제 4차 범민족대회’장을 한양대학교로 옮기다.
8월 15일 ‘93 제4차 범민족대회’를 한양대학교에서 거행 
8월 30일 한국기독교연합회관 9층 13호, 「범민련 남측본부(준)」 사무실 임대계약 체결

9월 23일 「한총련」소속 대학생, 국가보안법 철폐와 안기부 해체 요구 안기부 앞 시위 

10월 20일 「범민련 남측본부(준)」, 제18차 연석회의 개최. 조직위원회가 제안한 범민련 남측본부 운영 내규를 마련함. 

11월 17일 「범민련 남측본부(준)」, 제19차 의장단 실행위원 연석회의 개최. 의장단이 천거한 고문 7명(이강훈, 유혁, 류한종, 신도성, 이원명, 김윤식, 이형우)을 인준함 
11월 18일 「범민련 남측본부(준)」, 조직위원회에서 제안한 범민련 강령 규약안을 확정함. 강령 규약 확정안 공동사무국에 팩스 발송 
11월 22일 「범민련 공동사무국」발신으로 북, 해외본부가 남측이 심의 확정한 강령 규약에 동의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내 옴 
11월 28일 ‘민족자주 통일을 위한 북한산 등반대회’ 참여

12월 1일 강령규약 조기 선포 제안 공문 공동 사무국에 발송
12월 3일 「범민련」 고문단 초대 환영모임 개최(한일관)
12월 15일 「범민련 남측본부(준)」, 제20차 의장단-고문단-실행위원 연석회의 개최. 문익환 준비위원장과 이창복 실행위원장의 사의를 수리하고 의장단 고문단을 보선함.(고문단-이강훈, 신도성, 이원명, 유혁, 유한종, 이형우, 김윤식, 신창균(상임고문) /위원장-강희남 / 부위원장-전창일, 이종린, 이현수, 한총련 의장 /실행위원장-박석률) 
12월 16일 「범민련」 강령 규약 선포 남, 북, 해외 동시 기자회견(남측은 서울 세실레스토랑, 북측은 평양, 해외는 동경)
[ 공동의장단 회의 ]

2차 범민련 공동의장단회의(1993년 5월 30일, 중국 베이징)


- 전민족대단결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

- 민족자주의 원칙에서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여나갈 것

- 조국남부에서 사회의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해 줄기차게 투쟁할 것

- 조성된 정세와 조국통일운동 발정의 요구에 맞게 범민련조직들을 확대 강화하고 그 역할을 더욱 높여 나갈 것

- 제2차 공동의장단회의와 제4차 범민족대회의 성공적 실현을 위해 모든 힘을 다할 것


[ 범민족대회 ]



1993년 4차 범민족대회


소위 문민정부임을 자처했던 김영삼 정권의 출범이후 진행되었던 4차 범민족대회는 정권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하고 대회 성사를 위한 노력에서 양보를 거듭하며 수세적 입장을 취함으로 인해 대회 성사에 많은 어려움을 가져왔다. 


“민족의 화해와 단결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13∼15일까지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4차 범민족대회는 정부의 탄압으로 서울과 평양 그리고 동경에서 분산개최 되었으며, 서울대회는 대회장소인 연세대를 경찰이 봉쇄하여 한양대로 옮겨 개최하였다. 4차 대회는 100여개 시군구 단위까지 지역행사가 치루어졌으며, 본대회에도 참여폭이 크게 넓어져 대학생 이외에 1만여명 이상의 각계각층이 대오를 이어 참여함으로써 조국통일의 열기를 과시하였으며, 범민족대회에서는 남측결의문을 채택하여 남북합의서 실천촉구, 한반도 평화정착, 일본군국주의화 반대, 연방제 통일방안의 거족적 합의 등을 발표하였다. 


정권의 탄압 이외에도 범민련과 범추본 내부의 어려움을 동시에 겪으며 추진된 4차 범민족대회는 이같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대회 개최이래 가장 많은 사람이 결집되었다.

이는 민족의 통일의지는 그 무엇으로도 꺽을 수 없으며 조국의 통일역량은 날로 장성강화되고 있음을 유감없이 보여준 것이다. 특히 '남북 합의서 설천 촉구 범민족 서명운동'을 대중적으로 벌여내어 남북합의서 실현에 대한 공감과 지지를 얻어낸 것은 소중한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4차 대회는 대회 준비과정에서 남측 범추본이 해외나 북과의 연락과 실무접촉을 애초에 포기하였으며 범민련 해소문제가 제기되고 공동 결의문도 채택되지 못하는 등의 여러 가지 문제들이 벌생하였으며, 이후 통일운동상의 편향과 통일애국세력의 분열을 가져오는 첫 지점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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