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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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쟁일지 ]

1월 15일 범민련 출소자 6명, 환영대회 

1월 19~21일 「전국연합」 수련회에서 <통일운동의 약평과 방향>이라는 문서

    를 통해 ‘범민족대회를 계승하는 (가칭)통일민족대회’가 제안됨 

1월 24일 북측 ‘정당․사회단체 연합회의’ 개최. 조국해방 50돌을 맞아 거족적으로 경축행사를 벌이고 여기에서 ‘대민족회의’를 열어 조국통일방도를 협의, 확정하자고 제안함. 이에 대해 남측당국은 ‘대민족회의’ 개최는 받아들일 수 없고 경축행사를 하기 위한 차관급 회의를 열자고 수정 제안함. 북측은 남측당국의 수정제안을 거부하고 남측의 각 당, 각계 각층, 개별인사들에게 직접 제안함. 

1월 26일 「범민련 북측본부」중앙위원총회 개최. 정당, 사회단체 연합회의 제안을 받아들임. 


2월 7일 「범민련 남측본부(준)」은 ‘제6차 범민족대회’를 개최한다는 견해를 밝힘

2월 8일 「민족화해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약칭 : 민자통)」. <통일운동의 약평과 방향>을 비판하는 <자주적 통일운동의 힘찬 전진을 위하여 범민족대회는 계속되어야 합니다>를 발간. 

2월 19일 「전국연합」제 4기 정기 대의원대회개최. ‘범민족대회’와 ‘통일민족대회’를 상호 협력보완하는 대회로 동시에 추진하자는 개의안이 제출되었으나, 「한총련」이 내건 4가지 전제조건을 수용하면서 중집이 제안한 ‘(가칭)8.15민족통일대회’를 추진하기로 결정함. 

1월 25일 「범민련 남측본부」결성. 임원 인선(의장 : 강희남 / 부의장 : 전창일, 이종린, 이현수, 한총련, 지역의장 / 집행위원장 박석률, 사무처장 신정길). ‘제6차 범민족대회’를 개최한다는 특별결의문 채택 


3월 5일 「서청협」 제 5기 정기 대의원총회개최. ‘범민족대회를 계승하며 3자 연대를 실현하고 범민련 남측본부, 민족회의, 「전국연합」이 통일단결하는 8월 대회 개최’를 결정하고, 이것이 보장되지 않으면 다시 대의원 총회를 소집하여 방침을 정하기로 함. 

3월 초 「범민련 남측본부」를 중심으로 ‘제 6차 범민족대회 추진을 위한 예비 모임’조직.

3월 7일 ‘조국해방 50돌 경출 민족통일대축전 북측 준비위원회(이하 북측준비위)’결성. 남측과 해외에 민족통일대축전을 거족적으로 개최하자는 제안을 함. 

3월 11~12일 「한청협」 제 4기 정기대의원총회 개최. 「서청협」이 두 대회를 협력하여 개최해야 한다는 수정동의안을 제출하였으나, ‘범민족대회를 계승하며, 3자연대를 실현하고 남측 통일운동진영이 통일단결하는 통일민족대회를 개최한다’는 ‘8.15통일민족대회’ 사업계획안 확정. 

3월 28일 「범민련 남측본부 대구경북연합」 결성(의장 한기명)

3월 31일 「민족회의」 등 5개 단체가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8.15 50주년을 경축하기 위한 민족공동행사’ 개최를 제안. 

3월 31일 「한총련」대의원대회 개최. ‘6.3청년학생대회’와 ‘8.15통일민족

   ~4월 2일 대회’를 개최한다고 결정. 


4월 7일 「전국연합」 중집, 「전국연합」의 ‘(가칭)통일민족대회’가 민족공동행사임을 표방

4월 9~10일 「범민련」 제 3차 공동의장단회의 개최. ‘조국해방 50돌 경축 민족통일대축전‘(이하 민족통일대축전)과 ’제 6차 범민족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함. 

4월 22일 ‘8.14 50주년 민족공동행사 남측준비위원회(이하 남측준비위)’ 결성. 「범민련 남측본부」 참가 유보시킴. 

4월 29일 ‘제6차 범민족대회 추진을 위한 1차 간담회’ 개최 (예비모임 주최)


5월 초 ‘남측준비위’가 북, 해외에 행사준비를 위한 실무접촉 제의 

5월 12일 ‘북측준비위원회’가 “5월 하순에 베이징에서 각기 3명으로 구성된 쌍방 대표들 사이의 비공개 접촉을 가질 것을 제의합니다”고 화답. 

「민족회의」(박순경, 이창복, 황인성)와 「범민련 남측본부」(전창일, 이종린, 김영옥) 사이의 대표회동. 「민족회의」는 「범민련 남측본부」를 해체하고 통합하자고 제안하고, 「범민련 남측본부」는 지금 당장 통합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니 우선 당면한 실천을 공동으로 하여 통합의 조건을 만들어 나가자고 하였으나, 「민족회의」는 조직통합 없이는 공동실천을 할 수 없다며 「범민련 남측본부」의 공동실천 제안을 거부함. 

5월 16일 김영삼 정권은 통일안보계 장관회의를 열어 8.15를 기해 열리는 일체의 옥외 통일행사와 판문점 행사를 불허하기로 결정함. 

5월 26일 「민족회의」와 「범민련 남측본부」사이의 2차 대표회동. 12일의 1차회동과 같은 내용이 반복됨.


6월 2일 「범민련 남측본부」는 제 민주단체에 ‘제6차 범민족대회’를 공동 추진할 것을 제안함. 

6월 3일 ‘남측준비위’ 대표들, 통일원 장관을 면담함. 통일원은 ‘「범민련」을 참가시켜서는 안 되며, 판문점에서 공동행사를 하는 것도 안 된다. 소규모의 대표단을 교환하여 서울과 평양에서 분산 개최할 경우에는 지원할 용의도 있다’는 견해 밝힘.

6․3 범청학련 집회에 배포할 「범민련 남측본부」 유인물을 경찰이 불법 탈취함. 

6월 6일 ‘제6차 범민족대회 추진을 위한 2차 간담회’ 개최(예비모임 주최)

6월 8일 「전국연합」 중집은 ‘제6차 범민족대회’를 공동으로 추진하자는 「범민련 남측본부」의 제안(6월 2일자)을 거부함. 

6월 16일 ‘남측준비위 제2차 운영위개최’. 민족공동행사의 상을 확정함. 

‘제6차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 준비위원회(이하 범추본 준비위)’ 결성.

「범민련」자료집 5 제작, 배포 

6월 19일 ‘범추본 준비위’, 제 6차 범민족대회와 관련한 협의를 갖자고 통일원에 제안함. 

‘범추본 준비위’가 ‘남측준비위’에 민족공동행사와 범민족대회를 서로 협력하여 개최하기 위하여 협의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협의에 응하면 ‘범추본’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며 ‘남측준비위’가 거부함(이후 7월 11일과 13일에도 거듭 제안하였으나 모두 거부)

6월 20일 ‘8.15  조국해방 50주년 민족공동 통일대축전 해외준비위원회(이하 해외준비위)’결성

6월 21일 ‘범추본 준비위’, ‘제6차 범민족대회’와 ‘범추본’에 참가하도록 요청하는 공문을 노동조합, 총학생회 같은 여러 단체에 보냄

6월 24일 '범추본 준비위', 통일원이 6월 24일 면담을 거부한 것 관련한 항의 성명 발표. 

6월 25일 「범민련 남측본부 전북연합(준)」결성

「범민련 남측본부」 6.25성명 발표 

6월 26일 제6차 범민족대회 로고, 마크 선정

「범민련 남측본부」, ‘김일성 주석 1주기 추도행사에 조문대표단을 평양에 보내고자 하니 긍정적인 회답을 기다린다’는 공문을 통일원에 보냄. 

6월 29일 ‘범추본 준비위’, 7월 19-20일 범민족대회와 관련하여 북경에서 개최할 남, 북, 해외 실무회담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는 공문을 통일원에 보냄. 통일원은 불허 통보함. 

6월 30일 ‘범추본 준비위’, <6차 범민족대회와 민족공동행사에 관한 10가지 궁금한 이야기(10문10답)> 제작, 배포. 


7월 1일 '범추본 준비위', 통일원장과 면담을 위해 방문하였으나 통일원이 거부하여 항의 성명 발표. 

7월 3~4일 남측이 참석하지 않아 ‘공동 경축행사를 위한 3자 베이징회담’을 

    열지 못함. 

7월 4일 「범민련 남측본부 대전충남연합」결성(의장 정효순). 

7월 5일 ‘범추본 준비위’, 남측 당국이 면담조차 거부하고 있는 상황에서 「범민련」 제 3차 공동의장단회의 결정에 따라 ‘제6차 범민족대회’와 ‘민족통일대축전’을 판문점에서 개최할 수 밖에 없음을 「범민련」 공동사무국에 통보함. 

7월 7일 ‘범추본 준비위’, 통일원장과 면담을 위해 다시 방문하였으나 통일원이 거부하여 항의 성명을 발표함

7월 10일 주한 미국대사관에 보내는 항의엽서 제작, 엽서 보내기 운동 시작

7월 11~14일 ‘공동 경축행사를 위한 3자 실무대표회담(베이징 회담)’ 개최

7월 13일 「범민련 남측본부」,<95년 자주적 통일애국운동을 올바르게 전개하기 위하여>제작배포. 

이 즈음부터 ‘민족공동행사 남측 준비위’

7월 14일 「서청협」 5기 1차 임시 대의원총회 개최 : “8.15민족공동행사와 6차 범민족대회가 상호 통일단결하는 대회가 되도록 힘있게 추진한다. 이를 위해 「서청협」은 ‘범추본’에 적극 결합한다”고 결정함. 

「한총련」 중앙상임위, ‘범민족대회’ 불참 결정 

7월 15일 ‘제 6차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이하 범추본)’ 결성. 

‘노동자 추진위원회 준비위’ 결성. 

7월 18일 ‘민족공동행사 남측준비위’(이해학, 황인성, 조성범)와 「범민련 남측본부」(이종린, 이천재, 김영제)회동. ‘남측 준비위’는 합의문 제 6항인 「범민련 남측본부」의 가입 조항을 삭제하는데 동의할 것 요구하고, 「범민련 남측본부」는 “「범민련」은 공동 경축 행사와 범민족대회를 상호 협력하여 개최한다는 것이 기본 방침이며, 따라서 「범민련 남측본부」가 남측 준비위에 참가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힘. 

통일원, 「범민련 남측본부」에 ‘제6차 범민족대회’를 불허한다고 통보함. 

7월 19~20일 ‘제6차 범민족대회 개최를 위한 3자 실무회담’을 남측당국이 봉쇄함에 따라 열지 못함(7월 25-27일에 통신회담 방식으로 개최함) 

7월 21일 8.15 50돌 공동행사를 위한 3차 실무회담 공동합의문 발표. ‘민족공동 통일대축전’ 개최, 이를 위한 ‘민족준비위’ 구성, 행사일정, ‘남측준비위’에 「범민련 남측본부」참가 등 6개항 발표. 

‘범추본’과 「범민련 남측본부」 공동명의로 지지성명 발표. 

‘범추본’, ‘남측 준비위’에 “7월 27일 국가보안법 철폐와 평화협정 체결, 비전향 장기수 귀향 촉구집회”를 공동으로 개최하자고 제안. ‘남측준비위’가 이 제안을 거부하여 결국 7월 27일 연세대와 종묘공원에서 각각 따로 집회를 개최함. 

‘서울 지역 범추위’ 결성. 

「범민련 북측본부」, ‘남측 준비위’가 유포한 ‘범민족대회를 열지 않기로 북측이 동의했다’는 이른바 ‘이면 합의설’ 진상을 밝히는 내용인 ‘3자 회담과 관련하여 제기된 문의의 건’이라는 공문을 「범민련 남측본부」로 보냄. 

제6차 범민족대회 신문 1호 제작, 배포. 

7월 25일 ‘범민련 공동의장단 및 제 6차 범민족대회 실무회담대표 연석회의’ 개최. 7월 27일에 <제6차 범민족대회에 관한 공동합의문> 채택 

7월 27일 ‘국가보안법철폐와 평화협정체결 촉구대회’ 개최, ‘학생추진위 결의대회’ 개최와 선전전, 희망새 서울공연 시작. 청년추진위 결성을 위한 간담회 진행 

7월 28일 「한총련」 중앙상임위 개최, ‘남측준비위’에 「범민련 남측본부」가 참가하도록 해야 한다. ‘범추본’은 해체해야 한다, 「전국연합」 결정에 따른다는 결정을 함

7월 29일 ‘북측준비위’, <7월 21일 3자 공동합의문 해설>을 발표함.

‘남측준비위’ 긴급 대표자회의 개최. 「범민련 남측본부」가 ‘남측준비위’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제6차 범민족대회’ 명칭을 사용해서는 안 되며, ‘범추본’ 해산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결정함. 


8월 1일 ‘구로지역 노동자 - 청년 추진위(준)’ 결성

8월 3일 「범민련 남측본부」, 남측준비위에 공문을 보내어 7월 21일 공동 합의문에 따라 조건 없이 「범민련 남측본부」의 참가를 보장해야 한다고 지적함. 

‘남측준비위’ 4차 운영위 개최. ‘8.15민족공동행사의 틀 안에서 진행될 범민련 행사의 명칭은 제6차 범민족대회가 아닌 다른 것으로 조정되어야 하며, '범추본'을 해소해야 한다’고 결정함. 

8월 4일 ‘범추본 대표자회의’ 개최.「범민련」 규약을 바로 잡도록 「범민련」에 제안하기로 함

‘6차 범민족대회 청년추진위’ 결성 

‘인천경기서부 6차 범민족대회 추진본부’ 결성

‘남측준비위’, ‘「범민련」이 가입할 때 「범민련」 대표 1인을 남측준비위의 상임공동대표로 선임한다’는 8월 3일자 운영위 결정을 「범민련 남측본부」에 통보함 

8월 5일 ‘범민련 의장단-중앙집행위원 연석회의’ 개최 : 「범민련」 규약을 바로잡기로 결정 

‘6차 범민족대회 노동자 추진위원회’ 결성

「서청협」 주최 ‘통일한마당’ 개최.

「범민련 남측본부」, 부담스러울 경우 범민족대회를 민족공동행사 밖에서 개최할 것을 통보, ‘상임대표 1인을 파견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견해(범민련 대표가 남측 준비위 대표로 참가하는 문제에 대한 건)를 ‘남측준비위’에 전달함. 

8월 6일 ‘제 6차 범민족대회 통일선봉대’ 발대식

동대문경찰서 정보과장이 「범민련 남측본부」를 방문하여 ‘범민족대회 관련 모든 행사는 봉쇄하며, 대회를 강행할 경우에는 사법처리 한다’는 것이 당국의 방침임을 통보함. 이에 「범민련 남측본부」는 대회를 예정대로 개최할 것임을 밝힘. 

8월 9일 ‘6차 범민족대회 학생추진위원회’ 결성 

‘남측준비위’, 「범민련 남측본부」가 보낸 8월 5일자 공문(범민련 대표가 남측준비위 상임 공동대표로 참가하는 문제에 대한 건)에 대해 「범민련 남측본부」의 견해를 거부하며 범민족대회라는 명칭을 쓰지 말기를 바란다는 요지의 답변을 「범민련 남측본부」로 보냄. 

8월 10일 ‘남측준비위’(박순경, 함세웅, 이수갑, 황인성)와 「범민련 남측본부」 간부들(전창일, 이종린, 신정길) 회동. 서로의 견해를 교환하고 11일 오전에 ‘남측준비위 상임대표자회의’와 오후 5시에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단회의를 각각 열어 토의하기로 함. ‘남측준비위’는 ‘범민족대회를 제 3의 장소에서 하기로 합의하였다’는 말을 일방적으로 전국 각지에 전달 

8월 11일 ‘남측준비위 상임대표자회의’ 개최. ‘전창일 부의장을 상임공동 대표로 받아들인다. 「범민련 남측본부」가 '범추본' 해소에 나서주기 바란다’고 기존의 입장대로 결정.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단회의 개최. ‘북경회담 6개 합의 사항은 견결히 이행되어야 한다. 북경합의에서 단체별 행사를 보장한 조건에서 행사 명칭과 형식은 해당 단체 자신이 정할 문제로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제 3의 장소 운운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고 결정함.  

8월 12일 제6차 범민족대회 개막식, 통일선봉대 서울입성 

8월 13일 강희남 남측 범민족대회장 ‘제6차 범민족대회는 민족공동행사 안에서 「범민련」이 주최하는 행사로 한다’는 제안을 모든 애국민주단체에 함 / 서울시민 결의대회 개최 / 범청학련 통일대축전 개최(한양대)

8월 14일 '범추본' 대오와 「남총련」 등 범민족대회를 사수하려는 대오가 오전 9시경 서울대로 진입, 오후 3시경 「한총련」은 중앙상임위를 열어 범민족대회에도 참가하기로 결정함. 오후  9시경부터 민족공동행사장인 보라매공원에 있던 1만여 명의 학생들이 열을 지어 ‘범민족대회 사수, 「범민련」 강화, 연방제 통일’을 외치며 범민족대회장인 서울대로 들어오기 시작함. 

범민족회의(남측 지역회의) / 제6차 범민족대회 전야제 개최 

범민족대회 신문 3호 제작, 배포 

8월 15일 ‘제6차 범민족대회 보고대회’(새벽 서울대) 개최 

「범청학련 남측본부」, 구파발 일대에서 판문점 진격투쟁을 벌임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단회의, ‘대민족회의’ 등 판문점 대회지지 성명 발표.  

폐막식(한양대)


11월 19일 서울대학교 학생회관 강당에서 15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범민련 결성 5주년 기념대회’진행 

11월 29일 안기부, 보안수사대, 전국에서 29명 일제 연행(강희남, 전창일, 곽병준, 이종린, 김영옥, 신정길, 서상권, 김양무, 박동환, 고애순, 한기명, 도혁택, 김병길, 류근삼, 이천재, 정효순, 김상찬, 유혁, 김병권, 신창균, 김광렬, 이준우, 박석률, 나경일, 김형일, 김영재, 임재복, 김병균, 김동순 등 지도부 전원 연행, 구속) 

안기부로 연행된 전창일 상임부의장의 경우 박용 공동사무국 사무차장과의 대화, 공동사무국에 전송한 팩스 내용 등을 문제 삼아 간첩 혐의로 조사, 김병권 중앙위원의 경우 일본 방문시 달력 및 뺏지 판매 대금, 「범민련」 성원들과의 대화 내용을 문제 삼아 간첩 혐의, 신정길 사무처장은 간첩 방조혐의로 조사

그 외 신창균, 강희남 선생 등은 보안수사대(?)에서 주로 「범민련」 결성에 관한 건에 대해 조사 받음

「범민련」 사수와 애국통일인사 석방을 위한 비상대책위원회’구성 (위원장: 강순정) 

11월 30일 「범민련 남측본부」 성명서 <김영삼 정권은 「범민련」에 대한 탄압을 즉각 중단하라> 발표


12월 1일 ‘공안탄압 분쇄와 「범민련」 사수를 위한 농성’ 돌입(사무실) 

12월 2일 「범민련 북측본부」 의장단 비상회의 진행, 성명 발표   

12월 3일 ‘민족대단결의 밤’ 개최 (대구,「범민련 대경연합」 주최)

북측, <남조선의 「범민련」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결의문>을 보도 

12월 4일 임신 9개월이던 고애순 동지 구속(광주)

12월 5일 안기부 항의방문(100명)

12월 11일 이천재 부의장 경찰 병원 치료(단식으로 소변에서 피가 섞여 나옴)

12월 13일 독일에서 「범민련」지지 전화, 팩스 

12월 15일 강희남, 이천재, 김영제, 곽병준, 홍세표 검찰 송치

강희남 의장 단식 중단(17일간 단식)

오전 10시~오후 3시 독일의 한국 영사관 앞 시위(해외 팩스)

12월 20일 이천재 부의장 단식 중단(22일 단식)

12월 25일 「범청학련 북측본부」 성명 발표 

12월 27일 ‘「범민련」 사수와 통일인사 석방을 위한 송년의 밤’ 개최(단국대 학생회관)

「범민련」 공동사무국 성명 발표 

12월 28일 ‘범민련 북측본부 임시중앙위원회 총회’ 개최, <남조선과 해외 동포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채택

12월 29일 북측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성명 발표 

[ 공동의장단 회의 ]

​3차 범민련 공동의장단회의(1995년 4월 10일, 중국 베이징)  


- 민족통일대축전을 거족적인 민족공동의 통일대축전으로 되게 하기 위해 노력 할 것 

-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원칙에 기초한 민족 공동의 통일방도를 확정하기 위한 사업적극 전개해 나갈 것

- 제6차 범민족대회 추진, 진행

- 민족자주와 통일에 역행하는 반통일 세력의 책동을 저지, 파탄하기 위한 투쟁

- 범민련 조직을 민족대단결의 실체가 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


[ 범민족대회 ]

1995년 6차 범민족대회 


94년 하반기와 95년 상반기의 정세는 민족민주운동진영에게 미국과 김영삼 정권을 상대로 한치의 타협없는 투쟁을 전개할 것을 요구하였다. 무엇보다도 민족의 공멸을 가져올 미국의 핵전쟁 놀음을 파탄시키고 민족의 생존권을 보호하며 한반도의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전민족이 대단결하여 가열찬 반미투쟁을 벌여나가야 했으며, 신공안탄압을 일으키며 이미 화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김영삼 정권에 맞서 국가보안법 철폐투쟁을 광범위하게 벌이고 정권의 반민족적, 반민중적 경제정책에 파열구를 내는 투쟁을 통해 김영삼 정권을 퇴진으로 몰아가야 했다. 


이로부터 범민련에 제기된 과제는 일촉즉발의 전쟁위기로부터 한반도 평화를 지킬수 있는 제도적 장치인 북미평화협정체결과 국가보안법 철폐, 통일원년 1995년을 맞아 연방제를 대중속에 더욱 확고히 뿌리 내리게 하는 연방제 합의, 확산투쟁이었으며 이는 6차 범민족대회 중심 투쟁과제로 제기 되었다. 

95년은 지난 2년간 범민족대회 추진과정에서 드러난 내부의 이견이 노골화 되어 통일애국세력은 민족공동행사와 범민족대회라는 2개 대회를 치르게 된다. 준비과정에서 민족공동행사 준비위는 범민족대회라는 2개대회 성사 의지는 꺽을수 없었으며 범민족대회를 민족공동행사 내에서 치르고자 일정을 겹치지 않도록 하는 등의 세심한 배려를 기울인 범추본의 노력에 의해 6차 범민족대회는 서울대에서 어렵게 치루어 졌다. 


6차 범민족대회는 참가여부를 두고 14일 오후까지 논란을 벌임으로 해서 그 성사여부는 매우 불투명 했다. 그러나 14일 밤부터 서울대로 모여든 대중은 수만에 달했으며, 탄압과 개량의 거센 도전을 물리치고 의연히 범민련을 사랑하고 지켜온 대중들의 힘에 의해 범민족대회는 성사되었다. 

6차 범민족대회는 범민족대회의 의의를 자각한 대중들이 오로지 밑으로부터 주동적으로 참여해 옴으로써 성사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자주적 통일운동의 구심으로서의 범민련의 운동사에 또 하나의 금자탑을 쌓은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 대회는 전국연합을 비롯한 민족민주 운동세력의 대다수 상층부가 범민족대회를 철저히 막아나서는 가운데 그야말로 자주적 통일운동세력들이 자발적으로 온갖 지혜와 힘을 모아 이룩해 낸 땀의 결정체였으며 그런만큼 규모나 열기에 있어서도 그 어느 대회보다도 성대히 치루어 질 수 있었다. 


6차 대회는 어떤 어려움도 대중을 철저히 믿고 그에 근거하면 반드시 극복할 수 있음을 실증하였으며, 남측 통일운동진영 상층 일부의 패권성과 개량주의적 조류를 대중적으로 심판하고 범민련을 크게 강화시켰다. 

또한 대중들의 반미, 반 김영삼 투쟁의지를 모아냄으로써 반미, 반 김영삼 전선을 공고히 해 낸 대회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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