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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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쟁일지 ]

2월 19일 군산교도소 앞에서 강희남 의장 집단 면회 투쟁, 의장단 및 실무진, 전북지역의 학생 등 60여 명 참가 

2월 22일 「전국연합」 대의원대회, 8월 대회 관련 결정. 통일운동 진영의 단결을 위해 「전국연합」은 「범민련」, 「민족회의」와 함께 하는 거족적인 하나의 대회를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 / 대중적 민족대단결 운동의 성과를 모아 남과 북, 해외 3자가 함께 하는 거족적인 행사를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한다고 결정. 

2월 24일 「범민련 부경연합」서상권 의장, 안기부에 연행, 구속

2월 25일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단 회의 개최. 8월 대회 명칭은 제8차 범민족대회로 함 / 8월 대회 상은 북, 해외 및 「전국연합」, 「민족회의」 등 여타 통일운동 단체와 긴밀히 협의하여 거족적인 하나의 대회를 치러내도록 노력한다고 결정. 


3월 11일 「범민련 남측본부」, 「전국연합」, 「민족회의」 의장단 3자 회동, 이날 만남에서 「전국연합」의 3월 5일 상임집행위원회의 결정안에 기초하여 8월 대회의 정치적 과제를 설정한다는 것에 의견을 모으고 대회 명칭과 추진방향에 대해 더 논의하기로 함. (「전국연합」 상집 안 - 북 동포 돕기, 연방제 방식의 통일방안의 합의확산, 외국군 철수, 미국이 책임 당사자가 되는 평화협정 체결, 국가보안법 철폐, 일본 군국주의 부활 반대 등)

3월 20일 수원 경기대학교에서 「범민련 남측본부」 중앙위원 총회 개최, 100여 명 참가. 사업보고, 인선, 예산 결산안, 사업 계획 등 결정. 이종린 서울연합 의장을 직무대행으로 인준, 중앙집행위원장 김영제, 사무처장 민경우 선임.

3월 26일 「민족회의」 운영위원회 개최.  ① 평화통일민족대회는 8월에 한다 ② 통일운동의 대중적 전개라는 방침에 충실하게 3자연대를 위해 노력하되, 구체적인 판단은 의장에 위임한다 ③ 범민련」과의 협상에 관한 최종 판단은 「민족회의」 의장단에게 위임한다고 결정 

서래 스님(7차 범대회 통선대 대장) 안기부에 연행 


4월 4~6일 「한총련」 5차 정기대의원대회 개최, 8월 대회 방침 결정. ① 3월 20일 「범민련 남측본부」 중앙위원회에서 결정한 8차 범민족대회를 추진한다 ② '범추본'을 결성한다 ③ 「범민련」 공동의장단의 결의에 최고의 권위를 인정한다 ④ 「범민련」과 「전국연합」 합의시 이에 복무한다 ⑤ 기타 쟁점 사안이 있을 시 중앙상임위원회에 위임한다. 

4월 7일 ‘통일인사 강희남 목사 석방을 위한 전북지역 대책위원회 결성식 및 석방 촉구대회’, 100여 명 참가 

4월 23~24일 중국 북경 그레이스 호텔에서 ‘제5차 범민련 공동의장단회의’ 개최, 남측본부는 서면 참가. <공동 결의문>에서 “넷째, 우리는 제8차 범민족대회를 추진하면서도 올해 8.15를 계기로 민족의 자주권을 귀중히 여기고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남과 북, 해외의 모든 정당, 단체, 개별인사들의 광범한 참가 밑에 올해 하나의 거족적인 통일행사를 성대히 진행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다.”라는 요지의 8월 대회 방침 결정. 


5월 10일 「범민련 대전충남연합」 정효순 의장 안기부에 구속

5월 16일 대법원, 범민련 남측본부 이적단체 확정 판결 

5월 20일 진관스님, 1심 선고. 징역 3년 6월 


6월 18일 「범민련 남측본부」와 「민족회의」 의장단 회동에서 「민족회의」는 8월 대회를 중앙에 집중하여 개최하지 않고 지역에서 분산해서 행사를 개최하는 방침을 제기하면서 회동 결렬

6월 19일 남측본부 전창일 상임부의장, 대법원 확정판결로 재구속. 

6월 20일 남측본부 사무처장 민경우 안기부에 연행. 공동사무국 박용 사무처장과의 대화 내용을 문제 삼아 간첩 혐의 적용(실형 3년 6월 선고) 

남측본부 정효순, 김양무, 정윤하, 하태연, 노수희 구속

6월 24일 「범민련 남측본부」대표(이종린 나창순)와 「민족회의」대표(이창복 이수갑), 8월 대회에 관한 합의(6.24합의) 

① 대회 명칭은 97평화통일민족대회로 한다. 

② 정치적 과제는 「전국연합」 ‘3월 5일자 상집안’을 기초로 한다. 

③ 공동 결의문은 「전국연합」 ‘3월 5일자 상집안’을 기초로 각기 발표한다. 

④ 대회는 중앙행사와 지역행사로 한다. 

⑤ 추진본부 대회장과 집행위원장에 범민련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⑥ 기타 세부적인 부분은 추진본부에서 논의한다. 

⑦ 본 합의서는 7월 3일까지 양측의 의결 기구 인준을 받아 효력을 발생한다. 

6월 26일 「전국연합」 중앙집행위원회 개최, 6.24합의 추인 

6월 29일 「범민련 남측본부」 이종린,  나창순, 이천재 선생 연행, 30일 구속됨. 이후 실형 1년 선고)


7월 2일 「민족회의」 의장단회의에서 6.24합의 추인하면서 「범민련 남측본부」 명의를 제외하고 「전국연합」과 「민족회의」 명의로 97 평화통일민족대회 개최 제안서를 제 단체에 발송하기로 결정 

7월 3일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단회의에서 6.24합의를 추인하면서 다음을 결의함. 

① 6.24합의를 인준하며, 97평화통일민족대회의 제안 주체로 참여한다. 

② 97 8차 범민족대회를 8차 범민족회의로 대체한다. 

③ 산하 지역, 부문 조직은 실정에 맞게 3자 연대 사업(범청학련 행사 등)을 전개한다. 

④ 「범민련 남측본부」는 97평화통일민족대회와 8차 범민족회의 추진기구를 꾸려서 제반 실천사업을 진행한다. 

7월 4일 「범민련 남측본부」, ‘조미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거를 위한 7.4 기념식’ 개최

7월 8일 「범민련 남측본부」 나창순 부의장 안기부에 연행, 구속 

7월 13일 「범민련 대전충남연합」 정효순 의장 구속 

7월 18일 범민련 남측본부 김양무 상임부의장 구속

7월 19일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단회의에서 6.24합의 수용에 앞서 “3자 합의에 기초한 공동 결의문을 채택하고, 부문, 단체별 행사로 범민족회의 범청학련 행사가 보장되어야 하며, 남측 추진기구내의 범민련의 지위가 1:1로 보장되어야 함을 밝힌다”고 결정. 

7월 19일 「범민련 남측본부」와 「민족회의」 대표 사이의 회동하였으나 8월 대회와 관련한 합의 최종 결렬 

7월 22일 「범민련 부경연합」 하태연 의장 권한대행 구속 

7월 27일 ‘평화협정 체결 촉구 및 8차 범민족대회 추진본부 결성식’ 개최 


8월 1~4일 「범민련 남측본부」와 「민족회의」 대표 사이의 회동. 

8월 13일 「범민련 남측본부」 신창균 의장과 민족회의 이창복 의장의 회동이 있었으나 8월 대회에 대한 합의에 이르지 못함

8월 15일 ‘제8차 범민족대회’, 정권의 엄혹한 탄압으로 개최장소를 이동, 광주 조선대에서 개최 (‘97평화통일민족대회’가 「민족회의」의 주최로 용산가족 공원에서 개최되었고, 

             수도권 일부단체를 중심으로 ‘6.24합의 실천과 통일운동 단결을 위한 통일 한마당’을 서울 시흥동성당에서 개최함)

             이 자리에서 “첫째, 「범민련 남측본부」는  6.24합의 수용의 전제 조건을 철회하고, 「민족회의」는 삭제한 정치적 과제를 원상 회복시켜 6.24합의로 되돌아온다. 

             둘째, 「범민련 남측본부」와 「민족회의」가 평화통일민족대회의 중심 주체임을 천명한다. 

             셋째, 공동결의문에 3자연대성과 6.24합의에 따른 정치적 과제를 온전히 담는다. 

             넷째, 공동대회장, 집행위원장 문건작성과 실무회의에 「범민련 남측본부」가 결합한다”는 제안이 제기되었으나 「민족회의」 측이 동의는 하지만 서면합의에 반대하면서 협상 결렬됨

[ 공동의장단 회의 ]

5차 범민련 공동의장단회의(1997년 4월 24일, 중국 베이징)  


- 남과 북, 해외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민족의 자주권을 확립하기 위해 적극 투쟁할 것

- 긴장격화와 전쟁재발을 막고 완화와 평화의 새 국면을 열어나가기 위한 투쟁을 힘 있게 벌여 나갈 것

- 민족의 대단결로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투쟁을 더욱 힘 있게 벌일 것

- 8차 범민족대회를 추진하면서도 올해 8.15를 계기로 민족의 자주권을 귀중히 여기고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남과북 해외의 몬든 정당, 단체, 개별인사들의 광범위한 참가 밑에 하나의 거족적인 통일 핸사로 성대히 진행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 할 것

- 범민련 조직을 튼튼히 꾸리고 그 역할을 더욱 높일 것


[ 범민족대회 ]

1997년 8차 범민족대회 


94년 통일운동진영의 조직적 이탈과 분립으로 인하여 이남의 통일진영에게는 새로운 과제가 나타나게 되었다. 민민진영 일부의 타협절충식, 개량주의적 사고를 발단으로 하여 발생된 통일운동진영의 분산 분립으로 하여 95-96년 남측 통일운동진영의 두 개의 독자적인 행사를 치름으로써 민족대단결이라는 민족의 절대적 과제에 난관이 조성되게 된 것이다. 


8월 조국통일투쟁을 하나의 역량으로 결집시키기 위하여 범민련 남측본부는 남측내의 또 다른 통일운동단체인 민족회의를 상대로 협상을 하면서 통일운동에 원칙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탄력적 입장을 견지하였으나 민족회의는 이후 범민련의 범민족회의와 범청학련 통일대축전을 8월 통일행사의 공식행사로 인정할 수 없다는 분열적 논리 등을 내세움으로써 8월 통일투쟁을 거족적으로 전개하려는 각계각층의 통일진영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범민련 남측본부는 통일투쟁의 기본적 실천사업들을 책임 있게 실천하지 못하는 아쉬운 상황에서 급작스레 8차 범민족대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어떠한 성과도 발전시키지 못한 기나긴 협상과정으로 인하여 실무준비에 많은 차질을 빚게 됨으로 인해 범민련 남측본부는 어렵사리 7월 27일 "범민족대회 남측본부 결성식"을 한양대에서 치루게 되었다. 


8월 13일∼15일 판문점에서는 범민련 북측본부와 해외본부의 수많은 성원들이 모여 8차 범민족대회를 힘차게 진행하고 있을 때, 남측추진본부는 김영삼 반통일정권의 폭압적 탄압으로 인하여 판문점 범민족대회에 참여(범민련은 3자 실무회담을 통하여 남측추진본부가 김영삼 정권의 탄압으로 인하여 판문점에서 집결하지 못할 경우 남측 추진본부는 남쪽에서 범민족대회를 진행한다고 합의하였다.)하지 못하고 무장헬기와 특수진압부대를 동원하여 범민족대회장 진입을 가로막고 범민족대회를 무산시키려던 적들의 폭압을 뚫고 마침내 혁명의 도시, 반미의 도시 광주 조선대에서 8차 범민족대회를 장엄하게 치루어 내었다. 8차 범민족대회는 김영삼 반통일정권의 살인적인 광란으로 인하여 애초에 준비한 행사기간을 힘차게 진행시키지는 못했지만, 일정을 탄력적으로 조정하여, 지난 시기 여러 차례의 범민족대회보다도 가장 결사적이고도 장엄한 대회로 성사시켜내었다. 


주요 학생간부들을 끝까지 책임 있게 보위하기 위해서 판문점 진격 투쟁을 전개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으나, 범민족대회 참가만 하여도 전원 구속하겠다는 반통일 정권의 최후통첩에도 굴하지 않고 이남 땅 곳곳에서 참가한 애국대중들의 통일 의지는 8차 범민족대회를 단 한사람의 희생도 없이 치루어 낼 수 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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