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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통일전선을 향한 위대한 승리의 노정(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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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범민련남측본부 조회69회 작성일 06-08-11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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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통일전선을 향한 위대한 승리의 노정(초안)
  

2001년 05월 13일   범민련 남측본부 이메일 보내기   

민족대통일전선을 향한 위대한 승리의 노정(초안)
  서론
  조국의 통일을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첫째는 조미간의 관계로, 이 관계에서 풀어야 할 핵심적인 과제는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이다. 조미간의 평화협정은 주한미군 주둔의 정치적 근거를 결정적으로 박탈할 것이다. 둘째는 남북관계로, 여기에서는 7천만 민족이 균등하게 참여하는 정치협상을 통해 연방제 통일을 확정지어야 한다. 이 과정은 남북간의 각급 차원의 대화와 교류.협력을 동반하는 바, 이 과정은 각급 차원의 남북대화, 교류협력을 가로막는 국가보안법 체제가 무력화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셋째는 한미간의 관계로, 한국 민중은 미국의 내정간섭을 끊어내고 주한미군을 몰아내야 한다. 이 중 핵심적인 요소는 조미간에 형성되어 있는 정치군사적 대결 국면이다. 조미간의 정치군사적 대결 국면이 평화협정 체결로 해결됨과 동시에 나머지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비로소 조국통일이 완성될 수 있다.
  본 글은 7천만 민족의 대단결을 위한 민족대통일전선 형성을 기본 주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당국자 회담과 민간급 회담을 중심으로 민족대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노력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가를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이에 기초하여 향후의 과제를 도출해 보고자 한다. 
  본론 1. 남북 당국자 회담의 진행과정과 평가
  1. 남북 당국자회담의 진행과정
  1) 7.4 공동성명
  70년대 초반 동북아시아에 해빙 무대가 조성된다. 70년대 초반 동북아시아에 일시적으로 조성된 해빙 무드는 닉슨 독트린에 따라 미국의 동북아정책이 바뀌면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정세 변화에 즈음하여 70년 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북괴는 무장공비 남파 등의 모든 도발 행위를 즉각 증지하고 소위 무력에 의한 적화 통일이나 폭력 혁명에 의한 대한민국의 전복을 기도해 온 종전의 태도를 완전해 포기하겠다]는 점을 선언하고 행동으로 실증해 보인다면 [남북한에 가로 놓인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해 나갈 수 있는 획기적이고도 보다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한편 북의 김일성 수상은 시아누크 환영 연설에서 [남한의 민주공화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사회단체 및 개별적 인사들과 아무때나 접촉할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였다.
  이러한 남북간의 성명을 통한 우회적인 대화는 71년 8월 12일 최두선 대한 적십자사 총재의 [남북적십자회담 제안]을 즉각(8월 14일) 수락하면서 구체적인 대화로 발전하였다.
  71년 9월 20일 20일 적십자 1차 예비회담이 열린 데 이어 72년 5월에는 남의 이후락이 평양을, 북의 박성철이 서울을 각각 극비리에 방문하였고 이러한 남북 적십자간의 공개적인 대화와 비밀 접촉은 마침내 72년 7월 4일의 7.4 남북공동성명으로 구체화되었다.
  총 7개항으로 구성되어 있는 7.4 남북 공동성명은 제 1항에서 자주.평화통일.민족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 3대원칙을 확인한 데 기초하여 2항에서 긴장상태 완화, 3항에서 다방면적인 교류, 4항에서 남북 적식자회담의 성사, 5항에서 돌발적인 군사 사고를 방지하고 남북 사이에 제기되는 문제들을 신속.정확히 처리하기 위한 상설 직통전화의 설치 등 남북 사이의 현안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제6항에서 [쌍방은 이러한 합의 사항을 추진시킴과 함께 남북 사이의 제반 문제를 개선 해결하며 또 합의된 조국통일 원칙에 기초하여 나라의 통일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이후락 부장과 김영주 부장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남북 조절위원회를 구성, 운영하기로 합의하였다]
  7.4 남북 공동성명을 전체적으로 요약한다면 조국통일의 기본 원칙을 합의한 데 기초하여 절실하고 현실적인 당면 현안을 상호 합의, 해결하고 위의 3대 원칙에 기초하여 향후 과제는 남북 조절위원회에서 다루자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7.4 남북공동성명에서 합의되었던 조국통일 3대원칙의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7.5 김종필 총리는 국회 보고에서 남북대화에 대한 환상은 금물이며 유엔은 외세가 아니고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은 현존 그대로 적용할 것임을 명백히 하였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은 7.7 국무희의에서 지나친 낙관을 경계할 것과 반공 교육의 강화를 지시하였다.
  7.4 남북 공동성명에 대한 노골적인 배신 행위는 그 해 10월 17일 [평화통일이라는 민족의 염원을 구현하기 위하여 우리 민족진영의 대동단결을 촉구하면서] 운운하며 선포한 비상조치일 것이다. 10.17의 비상 조치를 통해 7.4 남북공동성명에 합의하였던 박정희 정권의 의도가 무었인가는 명확해졌다. 여기에 더해 73년 6월 23일에는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에서 UN 동시 가입과 교차승인을 기조로 하는 2개 국가 합법화 기도를 드러내었다. 또한 8월 8일에는 중앙정보부가 일본에 있던 김대중을 납치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발전하자 이북은 73년 8월 28일 김영주 남북 조절위원회 평양측 공동위원장 성명을 통해 남북대화 중단을 선언한다. 성명에서 이북은 6.23 선언과 8.8 김대중 납치 사건을 격렬히 규탄하며 [남북 조절위원회는 바로 민족의 대사인 통일문제를 협의.해결해야 할 크고도 무거운 사명을 지니고 있다. 이 신성한 민족공동의 기구에는 이후락이와 같은 자가 계속 눌러 앉아 있을 수 없다]고 지적하며 남북조절위원회가 [응당 전민족의 의사를 반영하여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당국자들뿐만 아니라 여기에 남조선의 각 정당, 사회단체, 각계각층 인민들의 대표들이 참가해야 한다] 지적하고 있다.
  70년대 초반 동북아시아의 해빙 무드를 배경으로 조성되었던 남북대화는 이렇게 중단되었다.
 
  2) 80년대 중반의 남북대화
  80년 1월 12일 북의 이종옥 총리가 [남북 총리회담]을 제안한 데 대해 1.24 남의 신현확 총리가 이를 수락하면서 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남북 당국자 회담이 다시금 재개되기 시작하였다. 총리 회담을 위한 실무 접촉이 진행되던 중 5.18 광주 항쟁이 일어나자 80년 9월 24일 북은 남북 총리회담을 위한 실무대표단 명의의 선언을 통해 남북대화 중단을 발표한다. 9월 26일 김일성 주석은 전두환 체제하고는 회담할 용의가 없음을 명확히 하였다. 
  80년 광주에서의 양민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전두환 정권과의 대화에 응하지 않던 이북의 태도가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84년 1월 10일의 3자회담부터이다. 84년 1월의 3자회담에서 이북은 [우리와 미국 사이의 이 회담에 우리 나라에 조성된 긴장 상태와 직접 관련되어 있는 다른 일방인 서울 당국도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참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인정한다. 우리는 3자회담을 진행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군사적 대치상태를 해소하고 긴장상태를 완화하는 문제가 모든 측면에서 충분히 담보되게 해결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3자회담에서는 북관 남 사이의 군사적 대치 상태를 해소하고 공고한 평화를 보장하기 위한 대책으로서 조선 정정전협정의 체약 쌍방인 우리와 미국 사이에 정전협정을 대신할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문제를 토의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북과 남 사이에 불가침 선언을 채택하는 문제를 토의할 수 있을 것이다......... 3자회담에서는 그 밖에 미국과 서울 당국이 제기하는 문제들도 토의될 수 있을 것이다. 3자회담에서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되어 긴장완화의 담보가 주어지고 조국통일의 전제가 마련된 다음 북과 남 사이에 대화를 열고 통일문제를 협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인정한다]고 밝히고 있다.
  84년의 3자회담을 계기로 80년대 중반 남과 북 사이의 일련의 당국자간 회담이 진행된다.
  84년 9월 8일 이북 적십자회에서 이남의 수해에 따른 구호품 제공 의사를 표명한 데 기초하여 그 해 9월 29일부터 10월 4일까지 쌀 5만 석, 시멘트 10만톤, 천 50만 미터, 기타 의약품이 남측에 인도되었다. 이를 계기로 70년대에 이어 진행된 적십자회담은 85년 5월 서울에서 8차 본회담이, 85년 8월에는 9차 본회담이 평양에서, 85년 12월에는 10차 본회담이 진행된다. 특히 85년 9월 20일부터 23일까지는 남북 이산가족과 예술단이 서울과 평양을 교차방문하기도 하였다.
  한편 84년 11월 15일 이래 남북 경제회담이 진행되었고, 85년 10월 이후 스위스 로잔에서 남과 북 그리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함께 참여한 가운데 각종 국제 체육행사에 남북이 단일팀으로 참가하는 문제, 특히 24회 서울 올림픽 공동 주최 문제를 두고 남북 체육회담이 진행된 바 있다.
  80년대 중반의 남북대화는 86년 1월을 계기로 다시금 암초에 부딪힌다. 86년 1월 20일 남북회담 북측대표단(경제.적십자.국회) 공동성명에서 [대규모적인 군사 연습을 강행하려는 현 실정에서 진행하여 온 남북회담들을 팀스피리트 '86 군사훈련이 끝난 후 회담 분위기가 좋게 마련되는 때에 가서 계속할 것이다]며 중단을 선언한다. 이어 8월 10일에는 남북대화 대표단 대변인 공동성명에서 [중단된 남북대화의 재개 및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서는 1. 북측이 발기한 군사당국자 회담을 남측이 지체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적십자.경제.국회(예비접초계 회담의 재개 분위기를 마련할 것, 2. 대화와 양립할 수 없는 전쟁도발 소동.반공대결정책의 중지, 3.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 운동 탄압 중지 및 체포.투옥 인사 즉시 석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 남북 기본합의서
  86년 1월 이후 중단된 남북대화가 다시 진행된 것은 88년 하반기 들어서이다.
  86년 김일성 주석은 신년사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경제회담과 적십자회담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고 국회회담을 조기에 실현시키며 남북의 최고위급 회담도 실현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라고 밝힌 뒤 이러한 대화가 [통일을 위한 대화]가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팀 스피리트 훈련을 중단하고 남북미간의 3자회담이 개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80년대 중반의 경제회담과 적십자회담의 성과를 고위급 정치.군사회담으로 발전시키려는 북의 구상은 86년 12월 30일 김일성 주석은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구체화되었다. 김일성 주석은 연설에서 [우리는 조국통일을 실현하는 데서 선차적으로 나서는 절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북남 고위급 정치.군사회담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정합니다. 북과 남 사이에 심각한 불신은 주로 정치.군사적 대치 상태로부터 생기고 있으며 그것을 풀고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쌍방의 정치.군사 실권자들의 노력 여하에 많이 달려 있습니다. 북남 고위급 정치.군사 회담에서는 상호 비방, 중상을 중지하며 남북 사이에 다방면적인 합작과 교류를 실현하여 민족적 유대를 도모하는 문제와 같은 당면한 정치적 대결 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대책들이 취급되어야 할 것이며 이와 함께 무력을 축소하고 군비경쟁을 중지하며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를 평화지대로 만들고 큰 규모의 군사연습을 그만두는 문제와 같은 당면한 긴장완화 조치가 조속히 협의되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86년 12월 김일성 주석의 [고위급 정치군사회담] 제안은 남북간의 이견으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88년 11월 16일 북측이 다시 [북남 고위급 정치군사회담]을 제의한 데 대해 남측의 강영훈 총리가 12월 28일 대북 서한을 통해 [나는 귀측의 지난 11월 16일자와 12월 20일자 편지에 대한 우리측 입장을 밝힌다]면서 [나는 이번 귀측의 제의를 충분히 고려하고 민족통일의 새 지평을 내다보면서 남북간에 신뢰 구축과 긴장 완화 문제를 포괄적으로 협의 해결해 나가기 위해 남북 고위당국자간에 회담을 열 것을 제의합니다]고 밝혔다.
  이로부터 89년 2월 9일 제 1차 예비회담이 개최된 이래 90년 7월 26일 8차 예지회담에서 [남북고위급 회담 개최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하였고 이에 기초하여 90년 9.5-6 역사적인 1차 남북고위급 회담이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계속된 남북고위급 회담의 성과에 기초하여 91년 12월 13일 제5차 고위급회담에서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었다.   
  남북 사이의 화해,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기본합의서라는 긴 명칭의 합의서의 서문은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재확인하고 정치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하여 민족적 화해를 이룩하고, 무력에 의한 침략과 충돌을 막고 긴장 완화와 평화를 보장하며, 다각적인 교류.협력을 실현하여 민족공동의 이익과 번영을 도모하며]라고 되어 있다. 또한 서문에서는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 관계라는 것을 인정하고]라고 되어 있다. 
  계속해서 합의서는 정치 분야를 다룬 제 1장 화해 항목, 군사 분야를 다룬 제 2장 불가침 항목, 교류협력을 다룬 제 3장 교류협력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해당 항목에 대한 기본 입장과 함께 이를 실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써 남북 화해위원회, 군사 공동위원회 등의 분과 기구들이 설치되게 되어 있다.
  86년부터 4년 여에 걸친 공개적이고 대중적인 회담과 남북의 총리급이 서명했다는 정치적 비중을 고려하여 남북 기본합의서가 갖는 의의를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남북기본합의서의 서문에는 7.4 남북공동성명의 3대 원칙이 재확인되어 있다. 7.4 남북공동성명의 조국통일 3대 원칙이 70년대 남북간의 일회적인 해프닝이 아니라 비록 일시적으로 좌절되기는 했지만 90년대 초반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조국통일 원칙임이 확고하게 천명된 것이다. 남북 기본합의서의 서문에 7.4 남북공동성명의 3대 원칙이 재확인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남북 기본합의서가 분단 고착화, 평화공존론과 같은 반민족적 통일 논리와 인연이 없음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첫째 의의와 연동해서, 남북기본합의서는 3개월 전 UN 동시가입으로 조성된 민족 문제의 국제화 경향에 쐐기를 박고 조국통일 문제를 민족 내부 문제로 확고히 전환시켰다. 남과 북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분단이 아닌 통일을 지향하며 영구적인 관계가 아닌, 잠정적인 특수 관계라고 하는 남북 관계에 대한 규정은 남북합의서가 분단 고착화, 두 개 국가 합법화론 같은 반통일적 궤변을 잠재우고 조국통일의 의지를 확고히 밝힌 역사적인 문헌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셋째. 전반적인 민족대단결운동을 상승 발전시키고 남측에서 국가보안법 체제에 일대 타격을 주었다. 90년대 중반부터 활성화된 남북 민간급 교류와 연동하여 남북 기본합의서의 창출은 조국통일 기운을 비상히 높여 놓았으며 국가보안법 체제에 돌이킬 수 없는 논리적 딜레마를 안겨 놓았다.
  이상의 의의에 비추어 남북 기본합의서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본다면 남과 북의 당국자가 남과 북에 현존하는 상호 제도의 체제의 차이를 인정한 데 기초하여 정치, 군사,사회경제 전 영역에서 공존.공영하며 이러한 상황이 통일을 지향하는  데로 발전해야 함을 명시했다고 볼 수 있다.   
  4) 김영삼 정권하의 남북 당국자 대화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어떤 동맹국보다 민족이 우선한다]고 천명하였다. 그리고 한완상 교수를 통일원 장관으로 임명하고 이인모 노인을 송환하는 등 전향적인 대북 정책으로 대내외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김영삼 정권의 대북 정책이 터무니없는 대북 강경 노선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것은 93년 하반기부터였다.
  93년 북미간의 위기가 6.11의 북미 1차 공동성명으로 타결된 이후 김영삼 정권은 클린턴 행정부의 이북 핵문제에 대한 정책을 비난하고 나섰다. 이북 핵 문제에 대한 일괄타결론이 부상하고 있는 가운데 김영삼 대통령은 클린턴과의 회담에서 철저하고 근본적인 핵 사찰을 주장하여 오히려 미 행정부보다도 극단적인 대북 강경책을 추구하여 상황을 악화시켰다. 
  김영삼 정권의 대북 정책의 돌이킬 수 없는 악수는 역시 정상회담 합의 이후의 태도일 것이다. 94년 6월 정점으로 치닫는 북미간의 위기는 6월 16일 미 국가안보회의에서 영변 핵시설에 대한 폭격을 주장할 정도로 심각한 양상으로 발전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북은 91년의 이라크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전쟁 모의실험 결과 10만명의 미군 사상, 1조 달러의 전쟁 경비라는 결과에 직면한 클린턴 행정부는 전 미 대통령 카터를 이북에 보내 외교적 해결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김일성 주석은 카터 방북을 계기로 북미간의 핵 위기를 타결함과 동시에 남북 정상회담을 전격적으로 제기해 나섰다. 김영삼 대통령이 이에 즉각 화답하면서 7.25 평양에서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합의되었다.
  유난히 무더웠던 94년의 여름, 82세를 넘긴 김일성 주석은 남북 정상회담을
두고 심근 경색으로 서거했다. 김일성 주석은 사망하기 직전 김영삼 대통령의 방북했을 때 묵을 숙소 등을
돌보기 위해 묘향산 등지를 돌아 보는 등 바쁜 여정을 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평생을 풍찬노숙하면서 보낸 노혁명가도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사상 초유의 역사적인 분깃점에서 심장의 부담을 이겨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 시점이 남북 관계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수도 있는 계기였다. 정상회담을 합의한 상대방의 죽음 앞에서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 하는 것은 불신과 대립으로 일관해 왔던 남북 관계에 중대한 전환을 가져올 수 있었다. 김일성 주석이 이북에서 갖고 있는 정치적 지위와 위상에 비추어 본다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불행히도 김영삼 대통령에게는 그러한 안목과 비젼이 없었다. 김영삼 정권은 전군에 비상 경계령을 내리고 이북에 조문을 가겠다고 나선 학생, 재야 인사들을 탄압했다. 거기에 더해 주사파 파동 등 메카시즘의 광기를 부리고 말았다.
  94년의 범민족대회와 김영삼 대통령의 8.15 경축사는 이러한 광기의 산물이었다. 
  94년의 범민족대회에 대한 김영삼 정권의 탄압은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대회 예정 장소였던 건국대를 봉쇄한 것은 물론 대회 참가자들이 건국대를 포기하고 서울대로 진입한 이후 경찰 병력을 밤 9시경 대회장으로 진입시켰다. 심야에 서울대 정문 앞에서 벌어진 혈투는 96년 연대항쟁의 서곡이었다. 그리고 8.15 대회를 마무리하기 위해 서울대 본관 잔디밭에 모인 참가들 위로 헬리콥터가 날기 시작했다. 대회장을 선회하던 헬리콥터에서는 형형색색의 최루액이 난사되었다. 폐막식을 위해 모여 있던 참가자들이 혼비백산 흩어지는 가운데 경찰은 수시간 동안 서울대를 완전 봉쇄하고 나서야 대회장 봉쇄를 풀었다.
  여기에 더해 94년 8.15 경축사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자유 민주주의 체제]로의 통일을 명시한 강경한 기조의 연설을 발표했다. 역대 정권의 대북 정책은 대체로 분단 고착화 노선이거나 점진적인 흡수통일 노선이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은 수년 내에 이북이 붕괴된다는 이북 붕괴론에 기초한 대북 강경 노선을 정책 기조로 하고 있었다. 95년 2월, 미국의 대북 정책이 연착륙 정책이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김영삼 정권의 대북 정책은 광란적인 성격이었다. 
  김영삼 정권의 광란적인 통일정책을 집약적으로 보여 준 것은 96년 7차 범민족대회였다.
  연대항쟁으로 알려진 이 사건의 본질은 김영삼 정권의 광란적인 대북 정책이다. 정권 재창출을 위한 정치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남북 관계에서의 일대 파란이 조성되어야 한다는 분석 아래 김영삼 정권은 이북에 대한 공세적인 압력으로 상황을 벼랑 끝으로 몰아갔다. 2만 여명의 학생이 서울 시내 대학에 모여 주한미군 철수, 북미 평화협정 체결 따위의 주장을 하는 것은 그다지 낯설은 모습이 아니다. 매년 연례 행사처럼 치러왔던 익숙한 풍경의 하나이다. 4년이 지난 2000년의 시점에서 보면 이러한 주장은 일반 시민들의 입을 통해서도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김영삼 정권의 시각에서는 7차 범민족대회를 사수하기 위해 모인 학생들이 정권 재창출의 정치적 환경을 조성할 절호의 기회로 보였을 것이다. 연대 항쟁은 본질에 있어 86년 10월말 정권 위기에 몰린 전두환 정권이 건국대에 모인 학생들을 상대로 벌인 유혈 진압의 재판이었다.
  김영삼 정권의 통일 정책이 이러한 조건에서 사실상 남북의 당국자 회담이 진행될 수 없었다.
  
   5) 98년 이후의 당국자 회담
   98년 2월 18일,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서 김용순 당 비서는 [통일시간표에 5년 동안의 공백이 생기게 하고 조국통일을 향한 겨레의 진군길을 멀리 후퇴시킨 장본인인 김영삼 정권이 곧 청와대에서 물러나게 된다]고 지적하면서 [남조선의 현 정치인들도 국가보안법과 안기부에 의하여 헤아릴 수 없는 커다란 피해를 받아 왔고 그 때마다 그것들이 무조건, 전면적으로 철폐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온 이상 국가보안법과 안기부를 전면적으로 무조건 없애지 못할 아무런 근거도 없을 것이다]라고 한 뒤 연북화해 정책으로의 정책 전환을 제기하였다. 김대중 신임 대통령 취임을 일주일 앞 둔 시점에서 개최된 위 회의는 김대중 정권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러나 98년 4월 베이징에서 개최된 차관급 회의는 이른바 상호주의라는 벽에 부딪혀 성사되지 못하였다.
  90년대 후반 이북의 통일정책을 집대성한 문건은 김정일 노동당 총 비서가 98년 4월 18일 [남북연석회의 50주년 기념 중앙연구토론회]에 보낸 [온 민족이 대단결하여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자]일 것이다. 이 서한에서 김정일 비서는 1. 민족자주의 원칙, 2. 애국애족과 조국통일의 기치 밑에 단결, 3. 북남관계 개선, 4. 외세 및 반통일 세력과의 투쟁, 5. 왕래.접촉 및 연대.연합의 강화라는  민족대단결 5대 방침을 천명한다. 위 서한 3항 북남관계 개선 조항에서는 [남조선 당국자들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명백합니다. 우리가 남조선의 력대 통치자들을 반대한 것은 그들이 집권자라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반대한 것은 남조선 력대 통치자들의 외세의존 정책과 반통일정책, 매국배족행위입니다. 우리는 남조선 당국자들이 진정으로 애국애족 립장, 련북단합의 립장에 선다면 그들과 민족의 운명을 함께 개척해 나갈 것입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99년 2월 3일 평양에서 개최된 정부.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서는 1. 올해를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의 해로 정하자. 2. 조국통일 3대 원칙을 고수하자. 3. 외세공조 파기, 국가보안법 철폐, 범민련.한총련 이적 규적 철회라고 하는 3대 조건을 전제로 99년 하반기에 남북 고위급 회담을 개최할 것을 제안하였다. 또한 남북 고위급 회담의 의제는 남북기본합의서 이행을 기본 의제로 하여 이산가족 문제까지를 의제로 다룰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99년 하반기 연석회의 제안의 특징은 첫째. 이전의 연석회의 제안이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인 데 반하여 회담 형식이 정부.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인 점 둘째. 이산가족 문제를 논의 대상으로 설정한 점 등이라 하겠다.
  99년 하반기에는 연북 화해 정책의 지표로 비전향장기수의 송환, 김양무 범민련 남측본부 상임부의장의 방북 치료 등을 제시하였다.
  2000년 4월 8일의 정상회담은 김대중 정권 집권 이후 치밀하게 당국자간 회담을 준비해 온 이북의 일관된 정책 기조의 연장선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6.13-6.15까지 평양에서 진행된 남북 정상회담(최고위급회담)에서 합의한 6.15 공동선언은 5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 바 제 1항은 민족의 자주를 원칙적인 차원에서 재확인하고 있고 제 2항에서는 통일방안, 제 3항에서는 이산가족과 비전향장기수 송환 문제, 제 4항에서는 각 분야에서의 교류.협력을, 제 5항에서는 이후 공동선언 이행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6.15 공동선언의 가장 커다란 특징은 아마도 제 2항목의 통일 방안의 문제일 것이다. 제 2항의 통일방안에 대한 합의에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 공통성이 있음을 인정]하였다. 이 항목은 남과 북의 통일방안의 공통성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이후 통일방안 논의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역사적인 의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 본다면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합의했다고 볼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3원칙, 3단계 통일방안의 제 1단계 공화국 연합단계와 91년 김일성 주석이 천명한 바 있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한시적이고 외형적인 차원에서 공통점이 있다. 남과 북이 외교권, 국방권을 가지며 느슨한 협의기구를 중앙에 둔다는 점에서 외형적인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외형적인 공통점에 비해 본질적인 차이점은 김대중 대통령의 1단계인 공화국 연합 단계는 법적으로 2국가이며 김일성 주석이 밝힌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외교.국방권을 남과 북이 따로 갖는다고 하더라도 법적으로 1국가이다. 또한 양자의 공통점이 한시적이라고 하는 것은 김대중의 통일방안에 따르면 공화국 연합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북이 자본주의로 변화해야 하는 반면 김일성 주석이 밝힌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향후 외교.국방권을 중앙정부로 귀속하는 높은 단계의 연방제로 발전하게 된다.
  양자의 공통점이 한시적이고 외형적인 반면 양자의 차이점은 본질적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통일방안은 시장 경제와 다당제라는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성에 기초하여 짜여진 통일방안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통일방안에 합의하고 나서 주한미군이 통일 이후에도 주둔해도 좋다는 발언을 쉽게 하고 있는 것은 그 만큼 김 대통령의 통일방안이 민족적 성격과 인연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 이북의 연방제 통일방안은 제도와 이념의 차이를 뒤로 돌리고 민족적 가치를 중심으로 짜여진 통일방안이다.
  6.15 공동선언 제 2항목은 4.8 정상회담 합의에서 조국통일 3대원칙을 재확인한 데 기초하여 진행되었으며, 6.15 공동선언 제 1항목에서는 민족 자주의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본다면 6.15 공동선언에서의 통일방안 합의는 통일방안 논의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놓았다는 성과적 측면이외에도 내용적으로 연방제 통일방안에 근접한 합의라고 볼 수 있다.
  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이북은 통일방안에 대한 합의를 중시해 왔다. 91년의 남북 기본합의서가 본질에 있어 불가침 선언을 중핵으로 한 북측의 정치.군사적 제안과 남측의 사회경제적 제안이 타협점을 찾으면서 도출하는 데 비중이 두어졌다면 2000년의 6.15 선언의 핵심은 통일방안에 대한 합의이다. 남북 기본합의서가 양 체제를 인정하는 데 기초하여 통일을 지향하자는 다소간 추상적인 차원에서 통일 조국을 가상하고 있다면 6.15 선언은 민족의 자주의 원칙 아래 통일 조국의 미래상에 대한 구체적 그림(통일방안)을 양자의 공통성을 찾는 차원에서 합의하고 있는 것이다. 
  2. 남북 당국자회담의 평가
  1) 대화의 주체와 관련하여
  ① 당국자 회담과 민간급 대화  
  남북대화의 주체와 관련된 남측의 기본 입장은 철저히 정부 중심이다. 박정희 정권의 경우는 남북문제와 관한 한 민간급의 관심 자체를 용납하지 않았다. 막걸리 반공법이 판치는 가운데 이북과 관련한 모든 논의를 독점하고 이에 저항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다른 어떤 현안에 비해서도 가혹하게 다루었다. 이러한 사정은 전두환 정권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88년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정은 일정하게 달라졌다. 노태우 정권의 대북 정책은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철저한 통제 정책과는 일정하게 궤를 달리하고 있었고 본질적인 것은 민간 진영의 자주적 교류 요구가 급격히 성장했다. 이에 따라 노태우 정권의 창구 단일화 논리와 민간 통일운동 진영의 자주적 교류 움직임이 격렬하게 충돌하였다. 반면 노태우 정권의 통제 범위 안에 있는 남북 민간급 접촉은 일정하게 허용되었다. 98년 집권한 김대중 정권의 기본 입장 또한 대체로 노태우 정권의 그것과 유사하다. 단 김대중 정권의 경우 비정치적 민간급 교류와 관련해서는 보다 유연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남측 정권이 민간급 대화에 소극적이었던 이유는 남측 정권의 한계와 깊은 관련이 있다. 반북대결 체제 위에 성립된 남측 정권의 입장에서 민간급 대화와 접촉을 허용하게 되면 정치적 통제력을 상실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북의 입장에서 남측 당국의 대화 상대방은 본질적으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정치세력이다. 70년 11월 노동당대회에서 채택된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 노선에 따르면 남에서의 지역 혁명을 강조하고 있고 80년 10월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방안에서는 연방중앙정부 수립의 전제조건으로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역대 남측 정권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본질에 있어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정권이라고 볼 수 없다. 차이가 있다면 통일정책에 있어 노태우, 김대중 정권이 상대적으로 일관되고 온건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박정희, 김영삼 정권은 노골적인 반북대결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이북이 남측의 역대 정권이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성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남북 당국자회담에 나서는 이유는 첫째. 이북 특유의 정치적 입장, 둘째. 당국자회담이 갖고 있는 고유의 지위와 관련이 있다. 
  북은 조국통일 문제를 철저히 민족 내부의 문제로 보고 있다. 이런 견지에서 북은 민족적 양심에 기초하여 조국통일 문제와 관련하여 입장과 정견을 초월하여 대화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남의 정권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정권 담당자의 정치적 결단은 조국통일 문제의 활로를 여는 데 있어 관건적인 문제라고도 볼 수 있다.
  북의 혁명 전통의 원류라고 볼 수 있는 일제 시대의 항일 무장 투쟁에서는 중국 구국군, 중국 공산당, 민족주의계 인사들과의 숱한 상층 통일전선의 역사가 있다. 이 과정에서 북의 집권자들이 취했던 입장은 반제, 민족독립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과거를 불문하고 협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협력은 전술적 동맹이 아니라 의리와 신의가 있는 전략적 단결이었다.
  이러한 입장과 태도는 조국통일 문제에도 일관되어 있다.
  이북의 민족대단결 노선을 집대성한 93년 4월의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에서는 [민족의 운명을 우려하는 사람이라면 북에 있건 남에 있건 해외에 있건, 공산주의자건 민족주의자건, 무산자이건 유산자이건, 무신론자이건 유신론자이건 모든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 단결하여야 하며 조국통일의 길을 함께 열어 나가야 한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97년 8월 4일 김정일이 발표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조국통일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에서는 [우리는 민족적 량심을 가지고 조국통일을 위해 나서는 사람이라면 어떤 사상과 신앙을 가졌건 또 그가 자본가이건 군장성이건 집권 상층에 있건 관계하지 않고 함께 손잡고 나갈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김정일이 발표한 98년 4월의 서한, [온 민족이 대단결하여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자]에서는 [남조선 당국자들에 대한 우리의 립장은 명백합니다. 우리가 남조선의 력대 통치자들을 반대한 것은 그들이 집권자라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반대한 것은 남조선 력대 통치자들의 외세의존 정책과 반통일정책, 매국배족 행위입니다. 우리는 남조선 당국자들이 진정으로 애국애족의 립장, 련북단합의 립장에 선다면 그들과 민족의 운명을 함께 개척해 나갈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다. 남북 당국자간 회담은 이북 정권 담당자들의 이러한 근본 입장의 소산이다.
  다음으로 민족대통일전선 형성에서 당국자회담이 갖는 지위와 역할이다. 당국자간 회담은 그것이 갖는 특성으로 하여 민족대단결 운동의 합법적 영역을 확대하고 법적 지위를 갖는 구속력있는 합의를 만들어 내며 민족대단결 운동을 비약적으로 강화한다. 7.4 남북공동성명 직후의 정세나 7.4 남북공동성명의 조국통일 3대 원칙이 25년 여가 지난 지금까지도 확고한 근본적 원칙으로 재확인되고 있는 점, 91년 남북기본합의서 합의 이후 급격히 확대되었던 조국통일 기운이나 남북기본합의서 정세가 국가보안법 체제에 심대한 균열을 가져왔던 점, 그리고 최근 6.15 공동선언이 남측에 몰고 온 가히 혁명적인 국민 의식 변화나 국가보안법 체제를 무력화한 점 등이 이러한 예에 해당한다.
  그러나 북측은 남측 당국자간의 회담을 내외 정세를 치밀하게 고려하여 추진한다. 북측이 주요하게 고려하는 요소는 첫째. 남측의 자주민주통일 운동과의 연관성이고 둘째는 한반도의 긴장 상태이다.
  72년의 7.4 공동성명은 70년대 동북아시아에 조성된 화해 무드를 남북 당국자간의 직접 대화를 통해 개척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이를 독재 체제 연장의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10월 유신의 선포, 민주인사의 투옥 심지어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후보를 해외에서 납치하는 중앙정보부의 만행 등이 그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자 이북은 73년 8월 28일 남북대화 중단 성명을 발표한다. 남북대화의 진행이 박정희 정권의 파쇼적 행각을 합법화해 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례는 남북대화 전 과정에서 일관되게 확인되고 있다. 80년 9월 24일 전두환 정권과의 대화 거부는 5.18 광주항쟁과 관련이 있고 86년 1월 이후 남북대화가 중단된 것도 87년 6월항쟁 국면이 치열해지는 상황의 소산이다.
  또 하나는 한반도의 긴장 상태이다. 한반도 상황의 본질은 북미간의 정치군사적 대결이다. 이북은 모든 대화의 지향을 이러한 한반도 상황의 본질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이러한 기조로 발전시키려는 데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남북 당국자간 대화가 북미간에 조성된 정치군사적 대결 국면을 희석시킬 수 있다고 판단되면 대화를 추진하지 않는 것이다. 80년대 중반 적십자회담과 경제회담이 매년 일정 기간 중단되었던 이유는 팀 스피리트 훈련이었다. 91년의 남북 기본합의서가 미국의 팀 스피리트 재개 선언으로 무산되었던 것은 이러한 사정의 극적인 표현일 것이다.
  위와 같은 두 가지 요소를 고려하는 데 기초하여 이북은 본질적으로 남북 당국자간 대화에 적극적이었다.
  72년 7.4 남북 공동성명은 70년대 초반의 긴장 완화 분위기를 남북 당국자간 회담을 통해 해결하려는 대담하고 적극적인 시도였다. 90년대 중반 노태우 정권의 분단 고착화 국면이 소련과 동구권의 동조로 성사 단계로 접어 들자 이를 적극적인 남북대화로 돌파해 낸 것도 평가할 만 하다. 94년 6월의 전쟁 일보 직전의 상황에서 전격적인 정상회담 제안을 통해 상황을 반전시켜 낸 것은 극적인 드라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00년 전격적인 정상회담 성사에 나섰던 것도 이러한 일관된 입장의 산물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이북은 연방제 통일의 주체를 7천만 민족 전체로 보고 있다. 따라서 남북 당국자간 회담만으로 연방중앙정부를 세울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더구나 이북의 입장에서 본다면 남측 정권은 예외없이 자주적인 정권이 아니다. 따라서 이북은 남북 당국자간 회담과 병행하여 민간급 대화를 추진하고 남북 당국자간 회담을 정당.사회단체들이 함께 참여하는 다무적, 쌍무적 회담으로 발전시켜 궁극적으로 정부.정당.사회단체들이 모두 참여하는 연석회의 또는 민족통일정치협상회의를 실현시키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북측의 입장은 70년대 이후 남북 대화 전 과정에서 일관되게 반영되고 있다. 이북의 대남 제안에서 대민족회의, 민족통일정치협상회의,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등으로 불리는 제안 등은 모두 이러한 사례이다.
 
  ② 남북관계와 조미관계
  조국통일 대화의 주체와 관련하여 특별히 주목해야 할 대목은 미국의 존재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한반도 문제의 핵심은 조미간에 조성된 정치군사적 대결 상태이다. 그리고 한반도 통일은 남과 북이 풀어야 할 민족 내부의 문제이다. 이북은 이러한 관점에서 대화의 의제와 주체를 분명히 갈라 보고 있다. 
  이북은 평화협정 체결 문제와 관련해서는 조미간에, 그리고 불가침 및 군축과 관련해서는 남북간에 풀어야 한다고 본다. 남북간에는 이외에도 정치적 대결 상태를 해소하는 문제이외에 다방면적인 교류와 협력 등이 협의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통일방도를 확정하는 문제 등이 민족간의 풀어야 할 과제이다. 
  남북미간에 벌어진 대화의 주요한 논점은 대화의 의제와 그에 상응하는 주체의 문제였다. 74년 3월 25일 최고인민회의 5기 3차 회의에서는 미국에게 조미간에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을 주장하였다. 84년 1월 10일에는 남북미가 함께 참여하는 3자회담을 제안한다. 3자회담에서는 조미간에는 평화협정을 남북간에는 불가침선언을 체결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북의 입장은 이후의 모든 과정에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이에 반해 미국과 남측 정권은 대화의 의제와 주체를 달리 잡고 있다. 74년 8.15 박정희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남북간에 상호 불가침 협정을 체결할 것을 천명하였다. 북의 입장에서 본다면 박정희 대통령의 위의 주장은 두 개 국가 합법화 기도의 연장선하에 있을 뿐만 아니라 본질에 있어 박정희 정권과 불가침 협정을 체결한다고 해서 평화체제가 실현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상 군사 문제의 실권은 미국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대화의 주체를 둘러 싼 이러한 논쟁은 중국, 소련, 일본 등을 포함하여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띄기도 하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라 볼 수 있다. 이북의 일관된 입장은 미국을 평화협정 테이블로 끌어 내는 것이다. 반면 미국은 이북을 상대하지 않거나 중국을 끌어 들여 4자회담이라는 형식으로 대화 구도가 조미로 맞추어지는 것을 어떻게든 회피하려고 하는 것이다.
  96년 4월 16일 김영삼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이 제안한 4자회담은 이러한 입장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양 정상은 4자회담을 제안하면서 [4. 양국 대통령은 한반도에서의 안정되고 항구적인 평화를 확립하는 일은 한국민이 이룩해야 할 과제라는 기본 원칙을 확인하였다. 양국 대통령은 새로운 항구적 평화체제를 추구하는 것은 남북한이 주도해야 하며 한반도 평화와 관련하여 미국과 북한간의 별도 협상은 고려될 수 없음을 재차 확인하였다]고 되어 있다. 4자회담이나 2+2 회담 구상(남북이 대화한 뒤 미중이 참여하는 방식) 등은 모두 이러한 입장의 산물이다. 반면 97년 12월 4자회담 1차 본회담에서 이북의 외교부 대변인은 [조미 사이의 평화협정을 맺고 남조선으로부터 미군을 철수시키는 것이 우리가 4자회담을 통해 해결하려는 기초적인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대화의 주체가 어떻게 조성되느냐 자체가 이미 첨예한 정치적 쟁점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2) 대화의 주제와 관련하여
  ① 분단고착화와 하나의 조선의 대립
  남북대화의 내용과 관련한 가장 근본적인 대립의 내용은 남측이 두 개의 국가로 합법화하려는 기조를 가지고 있는 반면 북은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을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다.
  남측 당국이 두 개 국가 합법화 기조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초반부터이다. 미국은 70년대 초반 전반적인 세력 약화에 직면하여 한반도에서 미군의 군사력을 축소 조정하는 대신 한일 군사유착, 한국군의 군비증강 등으로 보강하려 하였다. 그리고 다른 한 축으로 한반도 정세 안정화의 수단으로 UN 동시가입과 교차승인으로 상징되는 두 개 국가 합법화을 추구한다. 70년대 초반 박정희 정권의 남북대화 시도는 이러한 미국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었다.
  73년 6월 23일 남과 북에서 동시에 발표된 두 개의 성명은 남과 북의 입장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6.23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4. 우리는 긴장 완화와 국제 협조에 도움이 된다면 북한이 우리와 같이 국제기구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5. 국제연합의 다수 회원국의 뜻이라면 통일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여 우리는 북한과 함께 국제연합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6. 대한민국은 호혜평등의 원칙하에 모든 국가에게 문호를 개방할 것이며 우리와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들도 우리에게 문호를 개방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히고 있다. 같은 날 발표한 성명에서 김일성 주석은 [5. 우리는 분열이 고착되어 우리나라가 두 개 조선으로 영원히 갈라지는 것을 막아야 하며 대외관계 분야에서도 북과 남이 공동으로 나가야 한다고 인정합니다. 우리는 유엔에도 북과 남이 각각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며 나라의 통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유엔에 들어가려고 한다면 적어도 연방제라도 실현된 다음 고려연방공화국의 국호를 가지고 하나의 국가로 들어가야 한다고 인정합니다....]라고 하고 있다.
  남과 북의 위의 입장 차이가 정치적 격돌로 나타난 것은 노태우 정권 때이다. 노태우 정권은 북방정책이라는 이름 하에 두 개 국가 합법화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동한다. 70년대의 박정희 정권의 두 개 국가 합법화 노선이 전반적인 세력 약화에 직면하여 미국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수세적인 성격이었다면 노태우 정권은 소련.동구권의 변화 조짐과 맞물려 취약한 정치적 정통성을 보강하고 이북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려는 공세적인 성격을 띄고 있었다.
  노태우 정권의 두 개 국가 합법화 노선은 88년 24회 올림픽을 전후하여 헝가리를 시작으로 동구권 국가들이 노태우 정권을 승인하면서 현실화되기 시작한다. 노태우 정권의 구도가 결정적으로 관철되었던 것은 90년 6월 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소 정상회담이 열리면서부터이다. 정치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린 고르바쵸프는 30억달러의 차관을 대가로 노태우 정권을 승인하게 되고 이 결과 90년 9월 30일 한소 수교가 이루어졌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노태우 정권은 91년 초반 UN 단독 가입을 강행하겠다는 입장을 정리한다.
  노태우 정권의 UN 가입 강행 기도와 이에 소련.동구권 국가들이 일정하게 호응해 나서고 있는 조건에서 이북은 UN 단일 의석 가입안으로 [하나의 조선] 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노력한다.
  90년 5월 24일 최고인민회의 9기 1차회의에서 김일성 주석은 [통일이 실현되기 전에 북과 남이 유엔에 들어가는 경우에는 두 개의 의석으로 제각기 들어갈 것이 아니라 통일위업에 이롭게 하나의 의석을 가지고 공동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또한 90년 5월 31일 외교부 대변인 성명에서는 [고프바초프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의 상봉이 실현된다면 그것은 우리나라의 분열을 고착시키는 문제와 관련되는 심각한 정치적 문제로 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노동신문 6월 6일자 황진식의 기명 논평에서는 한소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두 개 조선을 조작하려는 미제의 음모 책동을 절대로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남조선의 유엔가입, 교차승인 책동을 비롯한 모든 형태의 두 개 조선 조작 놀음은 그 구실 여하를 불문하고 조선의 영구 분열을 추구하는 것이며 종당에는 미제의 전쟁노선에 복무하는 것]이다고 지적하고 있다. UN 단일의석 가입안과 노태우 정권의 두 개 국가 합법화 기도에 대한 직.간접적인 비난의 연장선에서 김일성 주석은 91년 신년사에서 [우리는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 방안에 대한 민족적 합의를 보다 쉽게 이루기 위하여 잠정적으로는 연방공화국의 지역자치정부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며 장차로는 중앙정부의 기능을 더욱 높여 나가는 방향에서 연방제 통일을 점차적으로 완성하는 문제도 협의할 용의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91년 5월 28일 노태우 정권의 UN 가입 강행을 저지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이북은 외교부 성명을 통해 UN 가입의사를 밝힌다. 이로부터 3개월 후인 9월 17일 UN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두 개의 국가로 가입하게 된다. 전 세계 민중이 지켜 보는 가운데 대한민국의 국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가 나란히 게양되고 두 개의 국가가 울려 퍼지는 참혹한 광경이 연출되고 만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본다면 김대중 대통령의 시각 또한 노태우 정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김대중 대통령의 통일방안은 3원칙, 3단계 통일방안으로 알려져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말하는 통일방안의 1단계는 남과 북이 외교.국방권을 각각 소유한 조건에서 남북을 연결하는 느슨한 협의기구를 두는 것으로 국가연합에 해당한다. 이 1단계에서는 평화공존, 평화교류, 평화통일의 3원칙이 적용되고 남북을 연결하는 느슨한 협의 기구의 운영은 만장일치제이다. 이 1단계가 10년 쯤 지나면 이북이 시장경제와 다당제를 수용하게 되고 남과 북이 모두 자본주의를 수용한 전제위에서 미국식 연방제를 시행한다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통일방안에 따르면 만약 이북이 시장경제와 다당제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사실상 남과 북은 두 개의 국가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입장과 관점에 서 있기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은 정작 본인이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라는 문안에 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에는 10-20년이 걸린다거나 현재는 통일을 말할 단계가 아니라 화해협력 단계로 규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② 정치군사적인 문제와 경제사회 문제
  남과 북이 대화의 의제의 선차를 다룸에 있어서도 극명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북은 정치군사적인 문제를 기본으로 대화를 전개하려 하고 남은 경제사회 문제나 이산가족 문제를 중심으로 대화하려고 한다.
  박정희 정권이 남북대화에 나선 기본 동인은 정치적 동기와 미국의 요구 때문이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극단적인 반북반공 대결 정책으로 사실상 남북대화나 남북관계에 대한 국민적 관심 자체를 두려워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이북은 줄기차게 정치군사적 문제의 해결을 촉구해 나섰다.
  80년대 중반의 남북대화는 남북의 입장 차이가 선명하게 갈라졌다. 84, 5년 진행된 적십자회담과 경제회담의 성과를 이북은 정치군사적인 문제 특히 남북의 불가침 선언 문제로 발전시키려 하였다. 반면 남측은 남북관계의 발전이 정치군사적인 문제로 발전할 경우 이를 통제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86년의 이남 사회는 통일 문제와 관한 한 70년대와 다를 바 없었다.
  남측이 정치군사적인 문제에 어느 정도 탄력성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88년 하반기 무렵부터이다. 노태우 정권은 공세적인 북방정책을 구사하고 있었고 이미 상황은 남북 문제를 무작정 통제한다고 통제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88년 하반기 남북간의 정치군사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북의 요구와 남측의 변화 지점이 맞물리면서 진행된 것이 남북 고위급 회담이다. 남북 고위급 회담 전 과정은 경제사회적인 문제를 중심에 둔 남측의 입장과 정치군사적인 문제를 기본에 둔 이북의 입장이 대비되었다. 양자가 일정한 타협을 이루면서 남북 기본합의서가 합의될 수 있었다. 
  98년 이후의 남북 대화 또한 이러한 점에서 큰 차이는 없다고 볼 수 있다. 김대중 정권의 기본 인식은 노태우 정권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다.
  반면 이북은 91년의 남북 기본합의서에서 남북간에 풀어야 할 핵심적인 현안인 남북 불가침 선언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다고 보고 있다. 6.15 선언에서 남북간에 평화나 군사적인 문제가 다루어지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북의 평화체제 구축 방도는 조미간 평화협정과 남북간 불가침 선언이다. 이북의 입장에서 불가침선언은 이미 91년에 합의되었으므로 대화의 의제는 남북간에는 조국통일방안에 대한 합의, 조미간에는 평화협정 문제가 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③ 통일방안의 문제
  이북은 통일방안에 대한 합의를 민족내부의 대화에서 풀어야 할 핵심적인 열쇠로 본다. 따라서 이북은 정부급 대화는 물론이고 민간급 각종 대화에서 통일방안에 합의를 중시하고 있다.
  반면 남측의 역대 정권은 통일방안에 대한 논의 자체를 회피하거나 거부했다고 볼 수 있다. 이유는 첫째. 남측의 통일정책 자체가 분단 고착화를 추구하거나 흡수통일을 목표로 하고 있는 조건에서 통일방안에 대한 합의는 부차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둘째는 통일방안에 대한 논의가 자칫 연방제 통일방안에 대한 확산과 국민대중의 통일 분위기를 고취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남측의 대화 의제에는 통일방안에 대한 것은 아예 고려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금번 6.15 합의의 핵심이 제 2항 통일방안에 대한 합의에 있었다는 점은 6.15 공동선언의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본론 2. 범민련을 중심으로 한 민간통일운동의 역사와 평가
 
  1. 범민련을 중심으로 한 민간통일운동의 역사
 
  1) 범민련의 결성
  ① 대중적 통일운동의 성장
  80년 광주항쟁은 한국 민족민주운동사에 일대 사변적 의의를 갖는 사건이었다. 광주항쟁을 계기로 한국 민족민주운동은 자주.민주.통일이라는 이념적 지향을 명확히 한 군중운동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민족자주와 대단결 노선에 입각한 조국통일 운동의 대중적 고양은 일정한 시간이 필요했다. 86년 반미반전 양키고홈을 외치는 학생들의 구호는 아직은 국민 대중이 공감하기 어려운 급진적인 것이었고 시대는 여전히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 국시다]라는 발언으로 현역 국회의원이 구속되는 이념의 불모지였다.
  대중적인 통일운동에 불을 붙힌 계기는 87년 6월항쟁에서 국민대중을 선도했던 청년학생, 종교계, 재야인사들이었다.
  88년 2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 교회 선언]을 통해 조국통일 3원칙에 인도주의와 통일논의의 민주화를 더해 조국통일 5원칙을 제창하며  95년을 통일 희년으로 할 것을 제안하였다.
  88년 3월 29일 서울대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한 김중기, 유재석군은 [김일성 종합대학 청년학생에게 드리는 공개 서한]을 통해 [올림픽을 민족대화합의 통일대제전으로 만들고 이를 통해 통일의 길로 나아갈 것이 요구된다]고 밝히며 [남북한 청년학생 체육대회와 국토종단 순례대행진을 위한 남북청년학생회담]을 제안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당시 2기 전대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아 88년 학생운동의 핵으로 부상하였다.
  88년 점차 고양되어 가는 조국통일 투쟁의 정점이 되었던 것은 6월에 열렸던 [6.10 민주화투쟁 1주기 기념대회 및 판문점 출정식]이었다. 2만여 명의 학생들이 연세대에 모여 행사를 가진 후 오후 4시경 판문점으로 향하는 통로인 홍제동 네거리에 연와하여 조국통일을 부르짓었다. 수천명이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드러 누워 최루탄 연기를 아랑곳하지 않고 조국을 통일하자고 외치는 모습은 반북 대결 체제에 가로 막혀 있던 국민 대중에게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한편 학생들의 선도적 투쟁에 고양을 받은 민통련, 민청련 등 재야 11개 단체가 88년 7월 20일 [조국의 자주적 평화 통일을 위한 민주단체협의회]를 발족했고, 종교계, 문화예술계 등 각계각층의 자주 교류에 대한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89년의 조국통일운동은 선도적인 방북 투쟁을 통해 노태우 정권의 두 개의 국가 합법화 책동을 저지하고 조국통일운동의 새로운 돌파구를 여는 데로 발전하였다. 또한 88년의 조국통일운동이 대체로 민간급 자주 교류에 중심이 있었다면 89년의 조국통일운동은 조국통일의 정치적 과제를 명확히 하는 데로 발전하였다.  
  89년 3월 25일 문익환 목사가 방북하였다. 70년대 중반 장준하의 사망을 계기로 재야 운동에 투신한 노 목사는 치열했던 반유신, 반독재 투쟁의 성과를 이어 다시금 통일 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길에 서슴없이 뛰어 든 것이다.
  문익환 목사는 평양 도착 성명에서 [나는 이제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던 윤동주의 마음, 모든 통일은 선이라고 외쳤던 장준하의 마음을 스스로의 마음으로 하면서 김일성 주석 동지를 만나고자 합니다]고 밝히고 있다. 문목사는 4.2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허담과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4.13 귀국하였다.
  89년 조국통일운동을 수 놓은 기념비적인 투쟁은 전대협 대표 임수경 학생의 방북일 것이다. 13차 세계 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 베를린을 거쳐 전대협 대표 임수경 학생이 6.30 평양에 도착하였다. 임수경 학생은 도착성명에서 [자동차로 불과 4시간이면 올 거리를 나는 24시간을 비행하면서 그리고 열흘이라는 시간이 걸려 이곳에 도착했다. 이것은 남한 정권이 반통일세력이기 때문이다. 진정 통일을 원하는 사람은 좌경용공세력으로 몰리고 있는 것이 남한의 현실이다. 돌아갈 때는 판문점을 통하고 싶으며 만일 한국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판문점을 통해 돌아가겠다]고 밝혔다.
  임수경 학생은 계속해서 7.1-8까지 평양에서 열린 세계 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참가하였다. 7.7 세계청년학생축전 행사의 일환으로 열렸던 [조선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조선 인민과 청년학생의 투쟁을 지지하는 연대집회]에서는 3기 전대협 의장 임종석 군의 위임을 받은 임수경 대표와 이북의 조선학생위원회 김창룡이 각각 서명한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에 관한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임수경 학생은 계속해서 7월 20일부터 7월 27일까지 [코리아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에 참여했고 [카톨릭 신자인 임수경씨를 보호하고 통일에 대한 열망을 확고히 하기 위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북에 파견한 문규현 신부와 함께 8월 15일 판문점을 통해 돌아 왔다. 
  전대협 대표 임수경 학생의 방북은 당시 한국 사회 분위기에 비추어 보면 충격적인 것이었다. 불과 3년 전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 국시여야 한다]는 이유로 현역 국회의원인 유성환의원이 구속되었던 것에 비추어 본다면 전대협의 방북은 한국 사회를 뒤흔든 비상한 충격이었다. 이에 노태우 정권은 상상을 초월하는 공안탄압과 여론몰이로 전대협과 조국통일운동세력을 탄압, 고립하려 하였다.
  89년 6월 30일 세계청년학생축전 결의대회가 예정되어 있었던 한양대 주변은 물론 서울 전역에 전경 병력이 집중되었다. 심지어 대회가 예정되어 있었던 한양대역은 지하철, 버스는 정차하지 않고 그냥 통과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회 성사 자체가 불투명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기상천외한 전술을 동원하였다. 지하철 2호선 각 역에 분산 대기하고 있던 학생들은 정해진 약속에 따라 일제히 한 차량에 모두 탑승하였다. 이렇게 학생들을 집중한 전동차가 지하철 2호선 뚝섬역에 정차하자 지하철을 멈추고 뚝섬역 철길을 따라 유유히 한양대로 진입하였다. 한양대를 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