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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8] 제국주의와 위기에 대하여 (1) - 강도 같은 (구)식민지 지배는 파멸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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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남측본부 조회279회 작성일 21-07-21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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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와 위기에 대하여 (1)

 - 강도 같은 (구)식민지 지배는 파멸을 맞았다


 [연재] 범민련의 ‘노동자와 통일’ (8)


 범민련 남측본부(2021.7.21)


 * 이 글은 노동조합 조합원을 위해 작성한 글입니다.


‘달도 차면 기운다!’, ‘십 년 세도 없고, 열흘 붉은 꽃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는 자연사와 인간사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특히, 다른 나라를 억압하고 착취하며, 침략하고 지배하는 제국주의에게야말로 이 속담이 딱 들어맞습니다.


오늘날 제국주의 우두머리인 미국이야말로 기세등등하며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세계 전역에서 패권을 부리고 있지만, 그 위세는 명백히 예전만 못할 뿐 아니라 점점 더 쇠퇴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제국주의는 미국이 정점에 선 체제이기 때문에 미국의 위기는 제국주의의 위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두 번에 걸쳐 쓴 이 글에서 다양한 사례를 들어 그것을 증명할 것입니다. / 필자 주


강도와 같은 식민지 지배와 억압


고대 로마도 광범위하게 식민지 지배를 하였고, ‘상업무역’ 시대에 스페인도 방대한 식민지를 거느린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국가들은 제국주의라고 하지 않고 제국이라고들 합니다. 제국주의는 고도로 발전한 현대 자본주의(독점자본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현대 제국주의도 1차 대전 이후부터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식민지배와 신식민지 지배의 1기, 2기로 나눠서 살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은 이탈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그리스반도, 서유럽과 남아프리카, 서아시아까지 지배하고 최대 점령지를 가지고 있었던 대제국이었습니다. 로마는 노예제를 기반으로 하는 식민지배 체제였습니다.


15세기 후반부터에서 18세기 후반에 걸쳐 이루어지는 ‘중상주의’ 시대의 식민지배가 있었습니다. 중상주의는 봉건제 시대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시기의 식민지배 체제를 말합니다.


스페인 제국은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아메리카 대륙, 필리핀 제도, 유럽,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에 방대한 점령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16세기와 17세기에는 당대 가장 강력한 제국들 중 하나였습니다. 18세기에 최전성기에는 영국에 앞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고 불렸습니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까지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네덜란드가 해상무역 진출을 하며 부각됐습니다. 그런데 이 식민지배 시대는 독점자본의 지배라는 현대제국주의와 성격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식민지 지배와 억압이라는 측면에서 본질은 하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강도와 같은 식민지배와 저들의 파렴치한 인식을 살펴보겠습니다.


콜롬버스, 원주민 학살자이자 악랄한 식민지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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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딘 순간을 묘사한 그림.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 경영의 시작점이었다. [사진-위키피디아] 


이탈리아인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스페인 제국 통치자들과 이권계약(식민통치 총독과 식민지배 이익의 분배)을 체결하고, 1492년 10월 12일 카리브해 바하마 군도라고 불리는 땅에 도착하였는데 그것을 ‘신대륙 발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대륙에는 이미 수천만 명의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발견’이라는 말은 오만한 제국식 표현입니다.


콜럼버스는 신대륙에 도착하자 스페인의 공동 통치자인 이사벨 여왕(Isabella the Catholic, 1451~1504)과 남편 페르디난트(Ferdinand the Catholic, 1452~1516)의 깃발을 꽂고 이곳이 스페인 영토임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들은 원주민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자신들의 포고문을 발표했습니다.


… 이 세계의 창조주이시고 통치자이신 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오니 …… 그의 대리자이신 성 베드로와 그의 영적인 후계자이신 교황, … 그리고 그 교황으로부터 전 세계의 통치권을 위임받으신 스페인의 가톨릭 왕에게 이 새로운 땅과 바다가 주어졌도다.


…… 너희들은 겸허히 주 하나님과 교황, 그리고 가톨릭 왕의 통치를 받아들일 것이며 복종할지어다. …… 만약 그리하지 않고 저항할 때 너희에게 일어나는 죽음 혹은 상처들은 전적으로 너희들의 잘못이지 우리 주군과 나, 그리고 나와 함께한 신사들 때문이 아니다. (지식백과, “유럽인들이 신대륙에 발을 내딛었을 때 신대륙에 상륙한 각국의 행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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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롬버스는 미국을 발견하지 않았다. 침략했다.” 위스콘신-메디슨 대학의 치카노(중남미계) 학생들 [사진-위키백과] 


요즘 미군 점령군 논란이 일고 있는데, 마치 일제로부터 해방 이후에 미군정이 이 땅에 진주하여 선포하던 맥아더 포고령과 같습니다. 이 ‘신사들’은 하나님을 앞세워 정복과 학살을 일삼는 악마 그 자체였습니다.


크리스토퍼 콜롬버스는 ‘위대한 탐험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콜롬버스는 원주민 학살을 일삼으며 악랄하게 식민지배를 하던 ‘총독’이었습니다. 북아메리카에서는 인디언을 포함해 약 오천만 명의 원주민들이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전후로 사실상 멸종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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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럼버스의 악행을 묘사한 삽화. “말을 탄 스페인인들은 길고 짧은 창을 들고 살인과 기괴한 잔혹행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도시와 마을에 뛰어든 그들은 어린이도 노인도, 심지어 임신을 한 여자와 그 뱃속의 태아도 남겨두지 않았다. 마치 우리 안에 가둔 양떼를 잡듯이 배를 가르고 토막을 냈다. 한 칼에 얼마나 통쾌하게 배를 가르느냐, 얼마나 멋있게 목을 자르느냐, 얼마나 똑바르게 창을 꽃느냐늘 놓고 서로 내기를 걸기도 했다.” [사진-위키피디아] 


콜럼버스가 처음 점령하여 총독을 했던 히스패니올라섬(현 도미니카/하이티)에서는 그가 식민지를 건설한 지(1494년) 2년 내에 섬주민 25만명의 반이 죽었고, 1517년 14,000명으로 줄었다. 캐리브해의 섬들에서 인디언들이 거의 절멸되었다. 인디언들이 급속하게 죽자 1501년부터 흑인노예를 데려오기 시작했다. 1500년경 2,500만명이었던 아즈텍 인디언 인구는 1600년에 100만명 정도로 감소되었고, 1530년경 1,200만명이었던 잉카 인구도 100년후 60만 정도로 감소되었다.


스페인사람들은 중남미에서 인디언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여 거부하면 고문을 하거나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였다. 거부한 사람들은 이교도이고 악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내에서도 그 당시 이슬람교도(1492년 스페인 내의 이슬람왕국을 완전히 정복했고 유대교도의 추방이 절정에 이르렀다)나 유대인을 그러한 방식으로 죽이거나 추방했다. 직접 죽인 사람보다 10배 이상이 질병과 기아 등으로 죽었다.


1500년 당시, 1,500만명 정도로 추측되던 북미 인디언은 1900년에는 23만7천명(인구 센서스에 나타난 기록)으로 축소되어 북미 인디언들도 거의 절멸 상태에까지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북미에서 영국이나 미국의 인디언 정책은 거의 절멸정책에 가까운 것이었다. 저항하는 자는 학살하거나 실제 수많은 부족들이 절멸당했다.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했다고 하지만 서구인의 인디언 학살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미주대륙에서는 수많은 종족(족 또는 부족)이 멸종당했다. 전체적으로 5,000만명 이상의 인디언들이 백인들에 의한 학살, 학대, 기아, 질병으로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 이보다 더 많을 가능성이 높다. (블로그 자료, 인디언 학살과 착취, 원출처: 이정덕 (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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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콜롬비아 반정부 시위대가 해안도시 바랑킬라에 있는 크리스토퍼 콜롬버스의 동상을 쓰러뜨렸다. [사진-미국의소리]


남미에 콜롬비아라는 나라가 있는데, 이 나라 명칭은 바로 콜롬버스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콜롬비아에서는 두 달에 걸쳐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데, 최근(6월 28일) 반정부 시위대가 콜롬버스의 동상을 쓰러뜨리며 시위를 했습니다. 콜롬버스가 원주민 학살자이자 악랄한 식민지배자였고, 오늘날 불평등의 씨앗을 뿌리고 민중의 고통을 가져온 악의 근원이자 원흉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고상하게 이름 붙인 중상주의의 시대는 실제로는 약탈과 피비린내 나는 살육과 전쟁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상업무역은 총칼과 대포와 군함을 내세운 식민지 교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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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에서 시위대가 주 의사당 외곽의 콜럼버스 동상을 끌어내렸다. 경찰 폭력으로 희생된 원주민들의 이름이 새겨진 성조기를 든 한 라코타 부족이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동상의 목덜미를 무릎으로 짓누르고 있다. 시위대는 “이 땅은 원주민의 땅”, “콜럼버스는 집단학살자” 등이 적힌 손팻말을 들었다. (2020.6.12.) [사진-미국의소리] 


16세기에서부터 18세기에 걸친 영국의 전 역사는 상업 및 식민지의 우위를 획득하기 위한 국가와의 투쟁사이다. 이 투쟁에서 무기는 자신의 식민지 건설, 상업협정, 그리고 전쟁이었다. 영국은 탐험대를 인도에 파견했으며 인도에서의 그들의 지배의 시작을 알리는 상관을 설립했다. 16세기 말에는 나중에 미국에 합쳐지는 북미지역에 수많은 식민지를 건설했다. 영국은 부분적으로는 불법적인 약탈을 통해, 부분적으로는 상업협정에 의해 이미 다른 나라가 장악하고 있던 식민지에도 진출했다. 영국이 인도의 포르투갈 식민지에 선박을 파견한다든지 포르투갈에 의류를 수출할 권리를 획득한 것은 후자에 의한 것이었다.


보다 위험한 상대와 잇달아 유혈전쟁을 벌였다. 16세기 말에는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무적함대라 불리던 스페인 해군은 1588년 완전히 격퇴되었다. 17세기에는 영국의 주된 경쟁자가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상인선단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상업과 산업이 번성했다. 영국에 있어 17세기가 네덜란드에 대한 투쟁의 세기였다면, 18세기는 프랑스에 대한 투쟁에 돌입한 시기였다. 1653년부터 1797년에 이르는 기간 중 영국은 해상전투에 66년을 소비했다. (아이작 일리치 루빈, 경제사상사ㆍ1, 지평, 함상호 옮김)


이러한 중상주의 시대에는 17세기 초반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등에서는 절대왕정의 후원을 받고 국가로부터 무역권을 부여받은 기업들이 동인도에 무역회사를 설립하여 식민지 지배를 위한 쟁투에 돌입했는데 이것을 동인도 회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전쟁을 치르는 군대는 기업이 보유한 군대였습니다.


1600년대 엘리자베스 여왕통치 시기에 잉글랜드는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해외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며 식민지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동인도회사를 기반으로 영국은 그 광활한 인도를 지배할 수 있었고 동남아시아와 중국에 식민지배를 확장시킬 수 있었습니다.


1782년 영국 동인도 회사 군대는 10만 명 이상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들 모두는 그 당시에 영국 군대보다 훨씬 더 많은 용병만으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국가는 이를 후원, 비호했습니다. 이 당시는 자본이 국가보다 더 힘이 셌습니다. 이 중상주의 시대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는 스페인으로부터 영국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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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88년 영국의 노예무역선 브룩스호. 한 사람에게 주어진 공간은 너비가 고작 40cm 정도였다. 손목과 발목, 목에는 쇠사슬이 채워졌다. 토사물, 용변도 누운자리에서 해결할 수 밖에 없었다. 짧게는 50일, 길게는 수개월이 걸리는 항해 기간에 10%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비위생적인 환경과 질병, 학대, 자살, 폭동 등이 사망률을 높였다. 4세기에 걸쳐 대서양 노예무역선에 강제로 태워진 1,200만명 중 150만명이 항해 도중 숨졌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바다에 버려졌는지 노예선이 뜨기만 하면 상어들이 그 뒤를 따랐다고 한다. 인류가 저지른 죄악 가운데 이보다 더 잔인한 일은 없었다. [사진-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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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예시장으로 끌려가는 아프리카인들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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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기 1500년경부터 본격화된 백인들의 흑인사냥으로 흑인은 사람이 아닌 일하는 동물로 취급되었다. 백인들에 의해 희생된 아프리카 흑인은 6천만명에 이른다. 또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은 1억명이 넘는다. [사진-위키피디아] 


부르주아 신사의 나라, 영국의 추악한 식민지배사


영국(잉글랜드)이 세계 지배를 하던 시기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시기, 혹은 중상주의 시기로부터 산업자본주의로 이행하며 자본주의가 성립된 시기였습니다. 영국이 식민지 패권을 독차지하게 된 것은 상업무역으로부터 세계 최초로 기계제 대공업을 바탕으로 산업자본을 발전시켰기 때문입니다.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지배계급은 부르주아(자본가계급)였습니다.


영국이 세계지배를 하는 동안 신사, 즉 부르주아의 나라 영국은 결코 신사적인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로마와 스페인이 그랬듯, 철저하게 식민지를 억압, 착취하고 식민지 인민을 집단 교살하는 악마의 나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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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아편 중독 피해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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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편을 합법화하면서 중국인은 마약 중독자로 변해갔다. 중국혁명 직전인 1948년 중국의 마약 중독자는 전체 인구의 15%(약 8,000만명)나 됐다. 마오쩌둥이 마약을 ‘인민의 적’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소탕 작전을 벌인 끝에 마약 중독자를 대폭 줄였다.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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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교과서는 아편전쟁에 대해 “중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순간”이라고 가르친다. 당시 청나라는 마약(아편) 무역을 자유화하라고 요구하며 선전포고한 영국에 패해 불평등조약인 난진조약을 맺고 홍콩을 넘겨줘야 했다. 이후 중국은 ‘아시아 맹주’에서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한다. [사진-위키피디아] 

 

중국을 상대로 영국이 전개한 전쟁이 바로 아편전쟁이었습니다. 제1차 아편전쟁(1839년 9월 4일~1842년 8월 29일)은 영국 상인들이 무장을 하고 광둥 연안에서 아편을 판매하는 것을 청나라가 단속하고 몰수했는데 이를 명목으로 발발된 파렴치한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중국 차, 비단, 도자기를 거래했는데, 특히 중국 차에 대한 수요가 폭발한 반면 영국 상품에 대해서는 수요가 늘지 않아 영국 은이 대량으로 중국으로 유출돼 버렸습니다. 그러자 영국은 파렴치하게도 인도 벵갈지방에서 재배한 아편 밀거래로 중국인들 상당수를 마약 중독자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것을 중국 황제가 막자 아편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러한 범죄행위는 동양을 미개하다고 무시하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뻔뻔하고 오만한 인식을 낳았습니다. 자본주의 발전으로 영국이 세계를 지배할 무렵,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라는 악명 높은 발언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내친 김에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라는 악명 높은 발언에 관해서도 알아보겠습니다. 흔히 제국주의적 망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이 말의 원래 맥락은 이랬습니다.


“만일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 잉글랜드인을 보고 인도와 셰익스피어 둘 중 어느 것을 포기하겠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도야 있든 없든 상관없으나, 셰익스피어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입니다! 어쨌든 인도 제국은 언젠가는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셰익스피어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박상익 옮김)


《영웅숭배론》에 나오는 토머스 칼라일의 이 말은 인도나 인도인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경제적 가치’(영국의 식민지인 인도)보다는 ‘정신적 가치’(셰익스피어)가 더 중요하다는 뜻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물론 인도와 영국의 과거사를 생각해 보면 오해의 여지가 있는 표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칼라일의 본의를 왜곡해서는 곤란하리라. (윌리엄 셰익스피어 -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극작가, 글 박중서 / 출판기획자, 번역가)


우리에게 알려진 말이나 칼라일의 원래 말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1841년《영웅숭배론》에 나오는 토마스 칼라일의 말은 셰익스피어의 문학적 가치를 표현하기 위한 비유였다고 해도, 당시 인도 식민지배를 하고 있던 영국과 영국인들의 오리엔탈리즘적 극단적 오만함과 인도인들에 대한 철저한 무시, 횡포, 위선이 잘 드러나는 말입니다.


이는 "‘경제적 가치’(영국의 식민지인 인도)보다는 ‘정신적 가치’(셰익스피어)”를 더 소중히 여기는 표현이라고 영국과 영국인을 감싸는데, 실제로는 저 고상한 정신의 나라 영국은 인도 전체는 고사하고 인도의 한 주, 아니 인도의 풀 한포기, 돌 한 덩이도 정신적 가치 따위를 위해 양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일례로 이 책이 쓰이고 16년 뒤인 1857년 유명한 세포이 항쟁이 벌어졌습니다. 영국은 수천 명의 인도인들을 살해하면서 항쟁을 잔인하게 진압했습니다.


위대한 세포이 항쟁은 영국 동인도 회사의 해체와 영국 국가가 사실상 그 기업을 직접 통치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영국의 동인도 식민지배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영국은 인도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대량학살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고상한 신사의 나라 영국은 인도에서는 악귀와도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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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인도회사 청산의 주요 원인이 된 세포이항쟁 묘사도. 세포이항쟁은 흔히 힌두교도들에게 소기름이 묻은 탄약통을 입으로 뜯게한 문화적 요인으로 일어났다 알려져있지만 장기간에 걸친 용병들에 대한 임금 후려치기, 체불 등이 쌓이고 쌓여 일어난 항쟁이었다.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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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7년 세포이 항쟁 이후, 영국군에게 붙잡힌 인도인들이 형틀에 묶인 채 발사를 기다리는 대포 앞에 세워져 있다. 사형수를 대포 앞에 묶어놓고 그대로 발포하는 말 그대로 인간 대포알을 만들어버리는 잔인한 형벌이다. 인도 점령기 영국이 주로 자행했다. [사진-위키피디아]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서산낙일과 제국주의 시대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린 것은 아프리카부터 인도, 중국, 아메리카까지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국의 독점적 세계지배의 시대는 19세기 후반에 들어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에 이어 자본주의 발전을 시작한 프랑스를 필두로, 19세기 후반에 독일통일과 함께 발전하기 시작한 독일, 영국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미국의 자본주의 발전, 메이지 유신(명치유신)으로 근대화, 즉 자본주의 발전을 개시한 일본의 부상, 봉건 짜르체제 속에서도 자본주의 발전을 시작한 러시아 등으로 인해 독점적인 영국 식민지배는 분할지배, 또는 재분할 전쟁으로 까지 나아갔습니다.


쇠퇴하는 제국이었던 중국은 영국, 프랑스, 일본, 미국이 조차지를 두고 분할지배 체제로 들어간 반(半)식민지였습니다. 그런데 영국이 지배하던 시대는 ‘자유경쟁 자본주의’ 시대였습니다. 그 이후는 ‘독점자본주의 시대’였습니다. 독점자본주의 시대는 여전히 영국 제국주의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서서히 쇠퇴하며 제국주의 사이에 식민지 분할과 재분할을 위한 투쟁이 벌어지던 시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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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점자본주의 시대는 여전히 영국 제국주의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서서히 쇠퇴하며 제국주의 사이에 식민지 분할과 재분할을 위한 투쟁이 벌어지던 시기였다. [사진-위키피디아] 


레닌은 이 전쟁이 이미 분할된 식민지를 제국주의 국가 간에 재분할하기 위한 전리품을 차지하기 위한 약탈전쟁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레닌은 《제국주의론》에 "자본주의 최고의 단계”라는 부제를 달았는데, 최고의 단계는 최후의 단계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최고 수준으로의 발전 단계인 제국주의 외 다른 발전 단계는 없으며 제국주의는 자기모순으로 인해 파멸하며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이행기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노동자 민중의 투쟁이 없다면 제국주의는 저절로 파멸하지 않습니다.


자유경쟁 시대의 자본주의에 대비한 독점자본주의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를 현대 제국주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와 관련한 《제국주의론》에서 레닌의 시대구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1) 1860~70년대 : 자유경쟁이 절정에 달한 단계. 독점체는 거의 눈에 뜨이지 않을 정도의 맹아에 불과하다.


(2) 1873년 공황 이후 : 카르텔은 상당히 발전했지만 아직 예외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아직 지속성을 갖추지 못한 일시적인 현상이다.


(3) 19세기 말의 호경기와 1900~03년의 공황기 : 카르텔은 경제생활 전반의 한 기초가 된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로 전화되었다.


그런데 현대 제국주의도 식민지 지배와 신식민지 지배로 1, 2 소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 침략적, 지배적 본질은 그대로 유지되지만 그 침략과 지배의 형태와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현대제국주의 지배는 영토에 대한 직접 지배를 하던 시절에 비해 신식민지 지배를 특징으로 합니다. 혹자(맥도프)는 최신 제국주의 현상을 "식민지 없는 제국주의”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현대제국주의도 영토에 대한 직접 지배를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방식은 현대제국주의는 보통 이전 제국주의가 모국 총독부를 통한 직접 지배였다면, 지금은 제국주의 모국 군사력을 현지에 직접 파견해 지배하되, 현지 권력을 내세워 형식적으로는 독립적인 외피를 내세워 더 세련되고 교묘한 지배를 합니다.


현대제국주의가 이처럼 식민지배 방식을 다르게 한 것은 러시아혁명과 식민지 민족해방투쟁의 피나는 성과 때문입니다. 제국주의는 더 이상 과거의 전면적이고 직접적인 점령지배 방식으로 통치를 유지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국주의의 본성은 그대로 인 채 신식민주의라는 통치방식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과거와 같은 직접 식민통치를 할 수 없다는 것 자체가 제국주의 지배의 위기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앞서 살펴봤듯이 영원히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일 것 같았던 스페인과 영국도 서산낙일의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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