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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슬픈 경우" - 통일애국열사 박종린 선생 추도식(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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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남측본부 조회233회 작성일 21-02-09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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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애국열사 박종린 선생 민족통일장’ 추도식 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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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 박종린 선생 추도식이 지난 1월 27일 오후 6시 인천사랑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다.[사진-범민련남측본부]

지난 1월 27일 오후 6시 인천 사랑병원 장례식에서 ‘통일애국열사 박종린 선생 민족통일장 장례위원회’ 주최로 고 박종린 선생 추도식이 엄수됐다. 이날 추도식은 분단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깊은 슬픔을 안겼는지를 새삼 확인하면서 내내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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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규재 의장, 권낙기 대표가 대표분향을 하고 있다. [사진-범민련남측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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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는 참가자들.[사진-범민련남측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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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역수칙에 따라 제안된 인원만 참석했고, 대부분 참석자들은 밖에서 함께 했다.[사진-범민련남측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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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진욱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의 사회로 진행된 추도식은 내내 엄숙한 분위기로 진행됐다.[사진-범민련남측본부]

“학생들에게는 통일할아버지로, 이웃들에게는 인품이 훌륭한 어른으로 존경받으셨던 선생님”

공동장례위원장의 대표분향을 시작으로 추도식이 시작됐다. 출소후 무안 해제중학교 매점에 근무하면서 ‘통일 할아버지’로 불리던 고인은 범민련 경기인천연합이나 <민족21> 등에서 일하면서도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쌓아왔고, 추도식에서도 ‘박종린 선생 청년동지회’ 고정석 씨가 고인의 약력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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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인의 약력을 낭독하고 있는 '박종린 선생 청년동지회' 고정석 선생.[사진-범민련남측본부]

이어 공동장례위원장인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와 이규재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의 추도사가 이어졌다.

“혁명유자녀학원을 나온 자존심 있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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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동장례위원장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사진-범민련남측본부]

통일광장의 권낙기 대표는 “박종린 선생과 같이 관계를 맺었던 사람 치고 박종린 선생에 대한 품성, 인품에 대해서 탓하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며 “사상성이니 당성이니 정치성이니 하고 매도를 하지만 그 모든 것들도 종국에 가서는 그 사람됨됨이고 그 사람의 인품이며 품성이다. 박종린 선생은 그 세 개를 다 갖춘 분”이라고 추도했다.

특히 “박종린 선생은 혁명유자녀학원을 나온 자존심 있는 분”이며, “공화국에서 당이라는 조직적 생활을 해보신 분”이라고 각별히 기렸다. 고인은 항일혁명열사 유자녀들의 교육기관인 만경대혁명유자녀학원을 다녔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에 자원입대해 화선입당하고 전쟁 후에는 통신부대 장교로 활동했다.

“박종린 선생을 생각하면 ‘참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슬픈 경우겠구나’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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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동장례위원장 이규재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사진-범민련남측본부]

2007년 평양에서 개최된 6.15민족통일대축전에 고인과 함께 참가했던 이규재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은 “마음속으로만 ‘저 사람이 내 딸이지’ 짐작하면서 손도 못 잡아보고 말 한 마디 못하고 되돌아서서 올 때 그 양반 심정이 과연 어땠을까 하는 것. 아마 그것은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그런 슬픔으로 최고의 슬픔의 경지가 아니었겠는가 싶다”며 “우리 민족만이 갖고 있는 이런 참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이러한 상황”을 개탄했다.

당시 평양 공동행사는 한나라당 의원의 주석단 배치 문제를 두고 행사가 파행을 거듭했고, 박종린 선생은 1959년 북을 떠나올 때 100일도 안 됐던 딸 옥희를 먼 발치에서만 보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안타깝다’거나 ‘슬프다’는 말로 그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이어 이규재 의장은 “불행을 씌워준 놈들이 미국놈들이라고 생각할 때 치솟는 분노가 하늘을 찔러야 한다”며 “2021년부터는 새롭게 마음가짐을 다잡고 미국놈 내쫒는 일에 전력을 다하자”고 ‘반미투쟁’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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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생님께서 다섯 살 즈음일까.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경찰서 유치장에 있는 분에게 쪽지를 건네주던 일이 어린 마음에도 독립운동을 하는 것 같았다고 하셨습니다. 10대 20대의 선생님을 저희는 보지 못했지만 그 시절 선생님 가슴에 넘쳐 흐르던 민족의 자주와 통일에 대한 열망을 보았습니다. 배우고자 찾는 젊은 일꾼들에게 당신을 낮추시며 일꾼들을 격려하고 귀기울여주시던 선생님, 선생님의 모습 하나하나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추모영상 중에서 [사진-범민련남측본부]

“분명히 ‘신병인수서’였다. 전향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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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영찬 목사는 고인과의 인연과 2000년 비전향장기수 송환대상에서 제외된 경위 등을 밝히며 울먹였다. [사진-범민련남측본부]

박종린선생의 추모영상이 소개된 후 임영창 전남 화순 만나교회 목사는 추도사에서 “93년 선생님이 출옥할 때 제가 신원보증을 한 것이 족쇄가 되었다”고 울먹였다. 임영창 목사는 “교회가 신원보증을 했다고 통일부는 박종린 선생이 전향한 것이라 판단하여 2000년 송환대상에서 제외했다. 아무리 정부에 탄원을 해도 전향했다는 그릇된 판단을 취하해주지 않았다”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자 참석자들도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34년을 감옥에서 살면서 남쪽에 가족이 없어 ‘일반면회’를 단 한 번도 못 해본 고인에게 따뜻한 손길을 건넨 곳은 시골의 작은 교회였다. 전남 무안군 용학교회의 임영창 목사와 배종렬 장로 등이 ‘신병 인수서’를 써주고 1993년 성탄절 전야에 병보석으로 출감한 것.

지금은 화순 만나교회에서 사목하고 있는 임영찬 목사는 “신병 인수서를 써서 제출하고 박종린 선생을 우리가 모시고 왔었다. 그런데 그게 박종린 선생에게 있어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족쇄가 되고 말았다”며 울먹였다. “분명히 ‘신병인수서’였다. 전향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을 쓴 것은 박종린 선생이 아니라 내가 썼다”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채택된 6.15공동선언에 따라 비전향장기수들이 송환됐지만 고인은 전향자로 분류돼 끝내 송환되지 못했다. 마음의 짐을 떠안은 임 목사를 불러 다독인 것은 오히려 박종린 선생이었다. “좋은 뜻으로 사랑으로 나를 감싸줬는데 내가 목사님과 영학교회 교인들 원망을 하겠나. 고마운 마음으로 지내고 있으니 염려하지 마시고 2차 북송 때는 올라갈 거다”라고.

그러나 비극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김혜순 양심수후원회 회장은 “그날 서울을 떠난 63분의 선생들이 ‘신념의 강자’를 맞이하는 격정적인 환영 인파에 둘러싸여 평양에 들어설 때 신혼 14개월 만에 헤어져 41년을 기다려온 로인숙 사모님이 그 자리에 계셨다. 선생님을 찾아 헤매다 오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모님은 충격으로 쓰러져 끝내 일어서지 못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한참 후에야 이 소식을 알게 된 고인의 비통한 심경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남쪽에서는 환송을, 북쪽에서는 환영을 받으며 북한으로 돌아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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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영찬 목사는 중국 훈춘 방문 때 두만강 근처에서 선생께서는 "떳떳하게 북으로 돌아가는 그것이 통일을 앞당기는 일이다"라고 말씀하셨던 사연을 소개했다.[사진-범민련남측본부]

임영창 목사는 박종린 선생과 함께 선생의 고향 중국 훈춘을 방문했던 일도 회고했다. 두만강 건너 코앞이 북녘 땅인지라 “박 선생님, 지금 얼른 넘어가 버리세요. 북한으로 가세요. 그리운 부인과 딸이 있는데 그냥 넘어 가세요”라고 권유했다는 것. “그때 박 선생은 눈에 눈물이 가득하고 목이 메서 한동안 말씀을 안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공식적으로 남쪽에서는 환송을, 북쪽에서는 환영을 받으며 북한으로 돌아가겠다. 그것이 통일을 앞당기는 일이다. 내가 지금 사라지는 게 통일을 앞당기는 게 아니라 떳떳하게 북으로 돌아가는 그것이 통일을 앞당기는 일이다.”

임 목사는 “박 선생의 인생은 통일에 대한 열망을 단 한순간도 버리지 않고 사셨던 분”이라며 “그분의 인생은 남북 분단에 가장 고통스럽고 괴로운 십자가를 온몸으로 짊어지고 사셨던 인생이라고 그렇게 평가할 수 있다”고 추도했다.

“환갑을 넘긴 딸 옥희씨에게 부고가 전달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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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동장례위원장 김혜순 양심수후원회 회장.[사진-범민련남측본부]

이어서 김혜순 (사)정의평화인권을위한 양심수후원회 회장과 이인화 민주노총 인천본부장, 범민련 공동사무국의 추도사, 양희철 통일광장 회원의 조시 낭송, 노래패 휘파람의 조가 '삶이란 무엇인가'가 울려퍼졌다.

김혜순 회장은 박 선생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통일부에 북으로의 송환이나 유해 송환을 요청했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며 “고령의 비전향장기수들을 가족품에서 여생을 마칠 수 있도록 인도적인 차원에서 송환문제를 다뤄주기를 학수고대했는데 코로나 핑계로 시간만 축낸 상황이 야속하기만 하다”면서 “환갑을 넘긴 딸 옥희씨에게 부고가 전달되었을까요? 혹여 아버지의 부음 소식을 들었다면 남쪽 당국에 송환을 요청하지 않을까 귀를 쫑긋 열어둬 본다”고 마지막 미련을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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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인화 민주노총 인천본부장이 인천 지역을 대표해 추도사를 했다.[사진-범민련남측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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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례위원회 호상을 맡은 이태형 전 범민련 경인연합 의장이 범민련 공동사무국 조전을 대독했다.[사진-범민련남측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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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희철 통일광장 회원이 조시를 낭송하고 있다.[사진-범민련남측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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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이란 무엇인가'를 부르는 노래패 휘파람.[사진-범민련남측본부]

“여러분들의 진심어린 방조와 손길을 북에 있는 우리 동생 옥희에 전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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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카 박건 씨가 유족 인사를 하고 있다.[사진-범민련남측본부]

유족을 대표해 중국에 거주하는 조카 박건 씨는 그간 고인을 돌봐주고 찾아와준 단체와 개인을 일일이 거명하며 고마움을 표하고 “이제 중국에 가게 되면 여러분들의 진심어린 방조와 손길을 북측 우리 동생 옥희에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딸 옥희씨는 2000년 비전향장기수 송환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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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례위원회 호상을 맡은 통일광장 임방규 선생.[사진-범민련남측본부]

호상을 맡은 통일광장 임방규 선생도 “우리 민족을 여러모로 괴롭히는 미국놈들을 조국강토로부터 축출하는 그런 통일운동에 죽는 순간 후회 가지 않도록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호상인사에 이어 참석자들의 합동헌화로 추도식이 마무리 됐다. 이날 추도식 참석자중 한 분은 “수많은 통일운동 동료들 후배들이 그리워하는 것을 보며 고인의 인품이 얼마나 훌륭하셨는지 알수 있었다”며 “박종린 선생님, 비록 혼백이나마 훨훨 날아 휴전선도, 보안법도 없는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편히 쉬소서”라며 애도했다.

고인의 유해는 28일 오전 6시 빈소에서 발인해 오전 8시 인천시립승화원에서 화장했고, 곧바로 서울 종로구 금선사에 모셔질 예정이었지만 갑작스런 폭설로 인해 인천시 부평구 자택으로 회향했고, 2월 3일 금선사에 안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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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도식 마지막 순서로 합동헌화를 하고 있는 이규재 의장, 임방규 선생, 권낙기 대표.[사진-범민련남측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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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동헌화와 참배를 하고 있는 참석자들.[사진-범민련남측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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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4년 감옥살이 만에 처음으로 박종린 선생과 바깥 세상을 이어준 배종렬 의장. 구순을 넘긴 배종렬 의장이 전남 무안에서 조문을 위해 빈소를 찾았다.[사진-범민련남측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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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 박종린 선생 장례에 각계에서 추모의 마음을 보내왔다.[사진-범민련남측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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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박종린 선생 장례에 각계에서 추모의 마음을 보내왔다.[사진-범민련남측본부]


<통일애국열사 박종린 선생 걸어오신 길>

1933년 3월 14일 중국 길림성 훈춘현 반석촌에서 부친 박승진(1945년 작고), 모친 채성녀(1988년 작고) 사이 5형제 중 넷째로 출생
1945년 3월 중국 훈춘 남신소학교 졸업
1945년 해방을 맞아 함경북도 경원군(현 새별군) 안농면으로 귀국
1945년 11월 조국광복회 항일유격대원 아버지 박승진님 별세
1947년 7월 함북 경원군 안농중학교 졸업
1950년 9월 만경대혁명가유자녀학원 졸업
1950 – 51년 인민군 자원입대, 오백룡사단 배속 전쟁참가, 낙동강전투 부상
1951년 12월 16일 화선입당(19세)
1958년 3월 로인숙님(24세)과 결혼, 59년 득녀(옥희)
1959년 6월 20일 연락책으로 남파(911 통신부대 소좌) 당시 딸 옥희 생후 100일
1959년 12월 29일 체포. 서울형무소 수감(국가보안법)
1960년 10월 28일 ‘모란봉 간첩단 사건’으로 무기징역 선고
1961년 2월 18일 대법원 무기징역 판결. 대구교도소로 이감
1976년 이른바 “ 붉은별” 조직활동 사건으로 무기징역 추가. 2중 무기수로 복역함. 광주, 전주, 대전, 대구교도소 생활
1993년 12월 24일 병보석으로 출옥후 신병치료함
1994년 7월 – 2000년 9월 전남 무안군 용학교회 등에 거주. 무안 해제중학교 매점 근무
2000년 9월 – 2001년 3월 상경. 경기도 과천시 소재 소환된 비전향장기수들(홍문거, 김은환) 운영하던 고서적방 인수운영함.
2000년 9월 평양 비전향장기수 환영행사(부인 로인숙여사 –쓰러져 별세하심). 딸 옥희(김일성종합대학 교수)
2000년 10월 통일광장 성원
2001년 범민련 경기인천연합 고문
2001년 3월 – 2004년 5월 월간 “민족21” 창간 참여 근무함
2004년 5월 – 2007년 5월 홍익대 부속 중고등부 학생매점에서 근무
2005년 범민련 남측본부 금강산 행사 참가
2007년 5월 이후 신병 등으로 무직
2007년 6월 범민련 성원으로 6.15 7주년 기념 남북공동행사(평양)에 참가
2008년 북경올림픽 남북공동응원단 참가
2015년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
2017년 8월 오랜 옥고의 후유증으로 대장암 판정, 투병생활
2021년 1월 대장암 증세 악화로 인천 사랑병원 입원치료
2021년 1월 26일 오전1시49분 숙환으로 별세. 향년 8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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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전


오로지 민족해방과 자주통일을 위해 헌신해 오신 박종린 선생님이 서거하셨다는 슬픈 소식을 접했습니다.

한평생을 오직 조국통일의 그날을 바라보시며 사랑하는 따님과 가족들이 기다리는 북송을 그토록 희망하여 살아오신 박종린 선생님!

역사적인 판문점선언 발표 시전시기로 되돌아 간 남북관계의 현 실태로 선생님의 소원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자주통일을 위해 한 몸 바치신 선생님의 순결한 삶을 이어 반드시 자주통일의 역사적 위업을 앞당겨 올 것입니다.

고 박종린 선생님이시여!통일조국의 품에서 영면 하옵소서.


2021년 1월 27일

조국통일범민족연합 공동사무국



조 전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한 평생을 다 바쳐온 박종린 선생이 서거하였다는 비보에 접하여 고인의 유가족들과 관계 여러 분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박종린 선생은 고결한 양심과 강인한 지조로 민족의 해방과 자주통일을 위해 한 생을 바쳐 온 진정한 통일애국지사였습니다.

한 평생 민족의 화해와 단합, 자주통일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쳐 온 선생을 잃은 것은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참으로 큰 손실로 됩니다.

평양에서 진행된 민족통일대축전장에서 해내외 대표들과 함께 손잡고 힘찬 구호를 부르며 자주통일의 희망찬 미래를 내다보신 선생의 모습은 우리의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비록 선생은 우리 곁을 떠났으나 선생이 그토록 바라던 조국통일은 반드시 실현될 것입니다. 

고 박종린 선생이시여

통일조국에서 고이 고이 잠드소서


2021년 1월 27일

조국통일범민족연합 해외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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