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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남녘 각 계 추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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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민련남측본부 작성일14-04-11 13:45 조회3,64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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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사
 
이종린 의장님,
조국 산천에 봄꽃이 만발한 이 때에 통일 조국의 꽃길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먼저 가시니 그 슬픔 가눌 길이 없습니다.
의장님은
뜨거운 민족애로 한 평생 청년의 마음으로 통일 조국의 제단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통일 애국의 표상이십니다.
 
남과 북 그리고 해외동포를 모두 합친 민족대단결 운동으로 외세의 간섭을 물리치고, 마침내 영광스런 통일조국의 대업을 이루려고 분투하신 의장님의 빛나는 정신은 육체적 죽음을 넘어 민족의 심장에 영원히 새겨져 온 겨레의 단합과 단결의 맥박으로 고동칠 것입니다.
이종린 의장님께서는 망국의 설움과 분단의 고통, 독재와 기만으로 점철된 우리 민족의 고통을 온 몸으로 새긴 우리 시대의 산 증인이자 그 고통을 이겨낸 철인이셨습니다.
일제 치하 헌병대에게 연행되신 이래로 해방 공간에서 분단세력에 맞서 결연히 투쟁하였고 탄압받으셨습니다. 이승만 독재에 맞서 4.19혁명으로 승리하셨지만, 박정희의 등장으로 또 다시 분루를 삼키셔야 했으며, 옥고까지 치루셔야 했습니다. 90년대 통일의 거리에서 남, 북, 해외 3자 연대 운동의 정당성을 각인하시고 범민족회의 소집 운동을 전개하시다 국가보안법으로 무수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마침내 6.15 시대를 맞아 남과 북, 해외의 동포 모두가 통일을 꿈꾸며 일하는 그 역사를 온 몸으로 맞이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그랬듯 보수 정권의 등장으로 남북관계 후퇴를 지켜보셔야 했습니다. 이렇듯 격동의 현대사에서 단 한 순간도 민족의 운명은 의장님의 운명을 비껴가지 않았습니다. 14번에 걸친 검거와 8번에 투옥 그리고 끊임없는 탄압. 가히 한 인간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버겁고 큰 시련이었습니다.
의장님, 이를 어찌 이겨내셨습니까?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습니까?
그런 고통 속에서도 오로지 민족을 생각하신 그 정신은 과연 어디에서 나온 것이었습니까?
식민과 분단 그리고 독재라는 그 어떤 민족도 겪어 보지 못한 참혹한 환란의 시대에도 의장님의 고결한 정신은 결코 꺾이지 않았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통일선봉대를 이끌고 전국을 휘몰아치던 의장님의 모습이 선연하며, 국가보안법의 철쇄를 끊겠다고 단식단의 선봉에 서셨던 백발의 의장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실로 민족을 사랑하는 지고지순한 신념에 기반한 헌신의 실천이었습니다.
하지만, 의장님의 분투에도 우리는 아직 국가보안법을 없애지 못했으며, 오히려 박근혜 정부 들어 국가보안법 피해자가 16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남과 북이 NLL을 사이에 두고 포격전을 벌이고, 포항에서 한미연합군이 평양 점령을 가상한 상륙훈련을 벌이는 등 역사의 퇴행을 목도하는 상황입니다.
가시는 걸음 얼마나 무거우실까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의장님을 떠나보내면서 우리는 수많은 고난과 고초를 겪으시면서 보여주신 의장님의 모습에서 뚜렷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남과 북이 한 민족으로서 단합하고 단결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통일의 길도 있고, 번영의 길도 있습니다. 
모두가 의장님이 온 몸으로 보여주신 이 길을 따라 힘차게 달려갈 것입니다. 
이제 고단한 몸을 누이시고 국가보안법 없는 세상에서 편히 쉬십시오.
삼가 의장님의 명복을 빌며, 의장님의 영전에 통일 애족의 면류관을 바칩니다.
 
2014년 4월 7일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 이창복
 
 
 
 
 
통일애국열사 송석(松石) 이종린 선생님 영전에 드립니다

아이처럼 맑고 고운 모습으로 맹수처럼 용감하게 싸우신 선생님.
조국을 빼앗기고 이어 조국이 분단된 죄로, 아니 조국과 민중을 애타게 사랑한 죄로 한평생 모진 박해 다 받으신 선생님께서 통일의 그 날을 미처 보지 못하시고 애석하게도 먼저 떠나셨습니다.
갑자기 허전합니다. 참으로 애통합니다.
 
송석(松石) 이종린 선생님.
선생님은 스물세 살 그 어리고 여린 나이에 일제 헌병대에 끌려가셨습니다. 그렇게 내딛은 발걸음은 지칠 줄 몰라, 선생님은 팔순에 이르러서 조국통일범민족대회 통일선봉대 대장을 하시고 이어서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의장을 하셨습니다.
가냘픈 청년이 남북해외와 더불어 8천만 겨레를 아우르는 큰 소나무가 되셨습니다. 그 드넓은 품 안에서 오늘도 하나 된 조국, 번영하는 민족,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향한 우리 민중의 소망은 더욱더 커지고 가일층 강력해지고 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팔순에 이르러 또 한 번 국가보안법으로 탄압을 받으실 때 소환과 수사, 재판 등 일체 불응하시는 투쟁을 통해 분단모순에 저항하는 우리 민중의 자세가 보다 원칙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일깨웠습니다.
 
여린 듯 강하시고 강한 듯 부드러운 선생님
불평등과 부자유, 분단 우리시대 온갖 모순에 맞서 싸우는 우리 민중에게 언제나 힘이 되신 선생님.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 모두에게 힘이 되어 주십시오.
하늘나라가 어디 저 먼 곳에 있겠습니까. 선생님 뜻 머무른 여기가 바로 선생님 계신 곳이고
그 뜻 따르는 우리 모두가 바로 선생님 아니겠습니까.
 
자주 민주 평등 평화 통일
조국통일 대동세상의 그 날 다시 뵙겠습니다.
부디 영면하시길.

2014년 4월 7일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 오종렬
 
 
 

 
추 도 사
 
이종린 선생님!
지난 3월 26일 벽제 요양소에 가서 찾아 뵈올 때 저희들을 그처럼 반겨 하시고, 건강 회복하셔서 금강산 다시 가셔야지요 했더니 아니 평양! 평양! 하시지 않았습니까? 
제가 찾아뵙기 전 주변사람들의 전언이 선생님의 기억력이 매우 흐리다 했습니다. 그날 김영옥, 권낙기 두 동지와 동행을 했었는데 저를 담박 알아보시고 어둔하나마 박동지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돌아오면서도 기억이 흐린 것이 아니라 분명 오래 사시리라 했었는데 이렇게 부음을 접할 줄이야. 정말 망연할 수밖에 없는 하늘만의 뜻이요 이치인가 합니다.
 
되돌아보면 선생님의 첫 대면이 1960년 연말경 첫 인사를 천도교의 박래원 이종률 선생과 함께였던 것 같습니다. 이듬해 2월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가 결성되고부터 을지로 사무실은 명실상부한 통일운동의 본산으로서의 위상을 높여 갔고, 61년 신학기부터 시작한 학생민통련의 남북학생 판문점회담 제의는 국내는 물론 세계여론의 초점이 되고 있을 무렵, 이를 지원하기 위한 민자통의 역할은 막중한 것이었습니다.
먼저 모든 시민의 지지를 얻기 위한 군중대회를 열기로 하고, 장소 문제로 고심하던 차 사무국을 맡은 선생님께서 동문인 서울운동장 소장 서윤복을 설득해 허가를 얻어 내고, 5월13일 5만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주최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통일촉진 궐기대회’를 성공리에 치르고, 이어서 종로 을지로로 양분하여 중앙청까지의 시위행진에는 거리의 시민들이 합류하여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가도 못하느냐>를 외치며 길을 메웠고, 그 장엄했던 행렬들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이 전 민족의 소원과 열기를 차단한 것이 3일 후의 5.16군사 쿠데타였으니.
이후 87년 6.10 민주화의 쟁취는 다시 통일문제를 일깨웠고, 89년 문익환 목사의 방북 이후 범민련을 구성하고 선생님은 그에 참여 승계하면서 많은 수난을 겪으셨습니다.
한번은 나의 사무실로 오셔서 일의 어려움과 연령에서 오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두 번째 구속에서 석방된 일)을 힘들어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일을 마다하지 못하는 것은 통일에의 소명의식이 아니었겠습니까.
 
2006년이던가 선생님과 서윤복 선생 자택으로 방문해서 반세기만의 과거의 고마움을 치하하고 덕담을 나누었는데, 불행히도 그는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함을 보고 세계를 제패한 건각(健脚)도 세월과 병마에는 어쩔 수 없나 보다고, 몹시 안타까워하며, “이렇게라도 통일 될 때까지는 사셔야지요”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후 경북 상주에 있는 황태성선생의 묘소를 참배하심에 그 가파른 산을 올라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민족의 고통을 덜 수 있는 통일사업에 도움을 달라”고 간곡한 소원을 빌던 선생님의 뒷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저 마지막 선생님께 사과드릴 일은 어느 날 안국동 음식점에 저를 부르시고 저더러 범민련 일을 도와주기를 부탁하셨는데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늦게나마 사과드립니다. 이유는 저의 역량이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해량하십시오.
회자정리(會者定離)와 생자필멸(生子必滅)이라는 인생으로는 어쩔 수 없는 법칙이라 하겠으나 너무나 허망함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남은 일, 부족하나마 명을 다해 매진하겠습니다. 혼령이라도 저희들의 일 보우해주십시오
촛불을 밝히고 맑은 술을 따라 올리며 명복을 빕니다.
 
2014년 4월 7일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명예의장 박중기
 
 
 
 

송석 이종린 선생님 영전에
 
그 모진 병마 훌훌 털어 내시고 활짝 웃으시며 오시길 기다렸지만 끝내 슬픈 부음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찾아뵙지 못해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마침내 선생님의 육신은 원래 오셨던 흙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맏아드님이 복받치며 아버님을 추도한 말씀처럼 선생님께서 뿌리신 수많은 통일의 씨앗들은 반드시 우후죽순이 되어 선생님께서 못 다 이룬 평생의 염원을 이뤄내게 될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남은 사람들 가슴속에 언제나 살아계실 것입니다.

선생님의 결코 짧지 않은 온 생애는 조국광복과 자주통일의 가시밭길이었습니다. 또한 선생님의 그 치열했던 투쟁에는 식민지조선의 지배수단이었던 치안유지법과 이 식민잔재를 그대로 이어받은 반통일 악법인 국가보안법과의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일제시기를 비롯해 치안유지법으로 다섯 번을 예비검속되거나 구속당하셨고 해방된 땅이면서 또 다른 외세강점기에는 국가보안법으로 열네 번을 강제연행과 구속·기소당하는 싸움이었습니다.
 
그 많은 국가보안법 공안탄압 가운데 2004년을 기억나게 합니다. 2003년 12월, 당시 민경우 사무처장과 함께 선생님께서는 국가보안법상 그 무슨 회합통신이니 찬양·고무니 하는 부당한 혐의로 강제연행당하셨고 검찰은 일방적으로 불구속기소했습니다. 그리고 2004년 9월 6일 서초동 법원 앞에서는 ‘이종린 선생 국가보안법 불인정 재판거부 기자회견’이 열렸었지요. 선생님께서는 국가보안법을 인정하지 않으셨고 이 반통일 악법으로는 재판을 받지 않으시겠다는 결심이셨습니다.
 
2004년 겨울, 그 세찬 한파 속에서도 ‘국가보안법 폐지 끝장 단식농성’이 여의도 국회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이셨던 선생님께서는 82살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동지들 못지않게 단식농성과 함께 여의도 윤중제를 행진하며 국가보안법 철폐를 매일같이 외치셨습니다.
그런데 법원은 11월 22일 강제구인장을 발부했습니다. 그리고 2004년 12월 20일, 여의도 농성장에서는 수백 명 농성자들과 함께 ‘국가보안법에 의한 재판, 강제구인 거부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 이종린 선생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여러 사람의 규탄발언도 있었지만 선생님의 그 단호한 국가보안법 불인정 자세는 강직,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나 검찰의 야만적인 강제구인까지 거부하기엔 물리적인 한계가 있었습니다. 저들은 선생님을 파쇼법정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재판거부발언이 있었습니다. “민족사적으로 이제는 우리 조국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통일세상을 이뤄내야 한다. 이러하기에 본인은 위헌성과 모순성이 내재한 국가보안법을 가지고 이 사람을 법정에 세워 심판하겠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재판거부·진술거부를 선언하셨습니다.
이렇게 선생님께서는 불의와는 단호히 맞서 싸우셨습니다. 그 불의의 범주에는 외세와 반통일 수구냉전세력이 있었고 통일운동 과정의 분열주의와 종파성도 있었습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특히 동지들에게는 따뜻하고 친절하셨으며 자애로우셨지만 민족의 존엄과 이익에 반하는 그리고 부당한 권력과 부당하게 얻은 가진 자들의 오만과 독선에는 한 치의 틈도 주지 않고 준엄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923년 2월 11일 전북 전주 송천동(현재)에서 유복한 집안의 3남 6녀 중 여섯째로 태어나셨습니다. 500여 평의 정원이 있는 저택에서 집안에 서당을 차려 학문을 닦으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집안은 갑자기 기울어졌습니다. 일제의 수탈과 민족말살행패가 선생님 가정에도 닥쳤던 것입니다. 일제는 선생님의 아버님을 반일운동혐의로 연행하기도 했습니다.
전북도청에 다니시던 선생님은 머리를 짧게 깎지 않는다는 이유로 끝내 강제징용에 끌려가 일본 대판(오사까)의 구축함건조공장에서 강제노역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의식 있는 일본인을 만나 그의 집에서 기거하며 사회과학서적을 맘껏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비로소 항일의식 뿐만 아니라 사회진보의식을 갖게 되셨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새로 익힌 지식과 세계관, 전쟁정세 등을 편지로 써서 고국의 지인들에게 보내게 된 것이 검열에 걸려 헌병대에 끌려가 가혹한 조사를 받고 끝내 구속당하는 아픔을 겪으셨습니다.
 
마침내 8.15광복을 맞아 선생님께서는 일제감옥에서 풀려나 해방된 조국으로 오셨고 징용에 끌려가기 전 결혼을 하셨던 선생님은 어린 아드님을 안으시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 만큼은 남의 나라 예속 하에 살게 하지 않겠다. 내가 당한 이 민족적 쓰라림을 결코 안겨주지 않겠다”고. 그러나 언젠가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자식들에게 어버이 구실을 제대로 못했고 자주독립국가 건설의 약속을 이루지 못했습니다’고.
선생님께서는 귀국하시어 도청에 다시 다니셨고 다른 한편 민주청년동맹과 남조선노동당에 가입하는 등 본격적인 자주통일운동에 온 몸 바쳐 헌신하셨지만 이는 곧 탄압과 고난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해방된 조국에서의 자주독립국가 건설이란 양식 있는 사람으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지극히 당연한 애족애국운동이었지만 일제를 대신한 새로운 외세와 침략외세와 결탁된 부당한 권력에게는 애국활동이 탄압의 대상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 같은 해방공간의 사회적 조건은 선생님의 남은 생애를 투쟁과 탄압이란 악순환으로 운명 지어 주었습니다. 청년동맹과 당활동, 전쟁시기 조직의 요구에 따른 헌신, 4.19 이후의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건설과 활동, 1988년의 민자통 재건, 1991년의 범민련남측본부 결성준비, 1995년의 남측본부 결성과정과 책임적 지위와 역할 등은 철저하게 자주통일을 이루겠다는 집념,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7.4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자주·평화통일·민족대단결이란 조국통일3대원칙정신이고 이를 토대로 한 남과 북, 해외의 3자연대의 조국통일 범민족연합 정신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같은 자주통일로의 이정표였던 우리민족끼리 자주통일을 재천명한 6.15공동선언 정신이기도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범민련남측본부 의장으로 계시는 동안 범민련의 통일강령도 6.15공동선언에서 천명된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공통점이 있음을 인정, 이 방향으로 지향하기로 한 내용을 원용하게 된 것도 전체 우리민족의 합의를 최고의 강령으로 받아들인 결단인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위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자주통일의 길에서 곁길을 가거나 분열행위 등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맞서 원칙성을 지켜내셨습니다. 그 어떠한 이유와 그 어떤 유명 인사라 해도 또한 공안 칼날이 노리고 있다 해도 3자연대의 틀을 지켜내셨으며 조직노선에서 그 어떠한 종파성에도 반대하셨습니다.
 
선생님!
생각해보면 저는 선생님과 단체와 조직은 달랐지만 민족민주운동에서 언제나 연대·연합 현장을 함께 한 시간이 많았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국가보안법 철폐투쟁에서 공동선언이행 등 자주통일운동 전쟁반대평화실현, 미군없는 평화협정체결투쟁, 평택미군기지건설반대, 이라크파병반대, 비전향장기수 송환운동, 양심수석방, 정치수배해제투쟁, 범민련·한총련 합법화투쟁 등에서부터 쌀수입반대, 쌀값보장, 한미FTA저지투쟁,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저지투쟁, 세입자·노점상 등 강제철거 반대투쟁 등 민중생존권 부문까지 선생님께서는 노구를 이끄시며 젊은이 못지않게 왕성한 활동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선생님께서 분주한 활동을 하시는 데는 강한 정신력과 역사적 과제에 대한 책임성과 헌신성이 받침하셨습니다. 또한 그에 못지않게 언제나 철저히 관리하셨던 체력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대한배구협회 총무이사를 맡으실 정도로 배구뿐 아니라 다양한 체력단련을 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등산이셨지요. 선생님께서는 전쟁 시기 입산투쟁 과정에서 수많은 동지들이 산화해 간 옛일을 회상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동지들이 산에서 다 죽었는데 죽은 동지의 발자취라도 밟기 위해 동지들을 생각하며 산에 오르기 시작한 게 벌써 50년(2005년 회상)째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랬습니다. 제가 선생님의 지도를 따라 산행을 한 지도 벌써 3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특히 강북 우이동에서 모여 북한산과 도봉산을 올랐었지요. 1980년대 초 당시 산행에는 선생님과 함께 민자통 조직위원장을 맡으셨던 일제시기에는 유명한 원산부두노동자파업 하셨던 소암 문한영 선생님이 지도하셨습니다. 민자통 선생님들 이른바 인혁당 유족들과 관련자, 남민전 관련자와 구속자들이 대개 함께 했었지요.
이렇게 선생님의 지도로 시작된 산행은 1992년 ‘양심수후원회산악회’로 다시 2007년 ‘6.15한마음통일산악회’로 이어졌습니다. 선생님께서는 2009년 당시 88세로 6.15산악회의 최고령 산악인으로 기록을 남기시고 그 뒤에는 안타깝게도 함께 하시지 못하였습니다.
 
선생님!
언제나 인자하시면서 사리를 분명히 하셨고 선비정신이 몸에 밴 통일애국지사 모습은 이제 다시 뵈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못다 하신 평생의 염원은 남은 사람들이 반드시 해 낼 것입니다. 외세공조와 동족대결 국제공조하의 변화유도와 급변사태와 흡수통일 망상까지 선생님의 가르침 따라 짓부수고 자주통일과 평화번영의 새 시대를 열어 나가겠습니다.
 
선생님!
이제는 국가보안법도 양심수도 없는 종북몰이와 공안탄압이 없는 하늘나라에서 편히 잠드시길 빌겠습니다.
 
2014. 4. 9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권오헌
 
 
 

추 도 사
 
고 이종린 선생님을 보내드리는 날입니다.
민족해방과 통일의 길을 이끄셨던 어르신들이 하나 둘 우리의 곁을 떠나십니다.
보내는 마음 안타깝지만 무심한 세월이야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향년 92세, 어쩌면 천수를 누렸다 할 수 있지만, 분단과 반동이 여전한 시대 속에 당신을 보내드리는 마음 아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고 이종린 선생님을 잘 안다 할 수 없습니다.
가시는 길에서야 그 분의 발자취를 짚어봅니다.
팔팔한 청춘부터 노환이 깃든 최근까지 당신의 인생은 단 하루도 민족과 통일, 이 숭고한 단어를 빼곤 설명할 수 없는 나날이었습니다.
통일을 향한 염원은 당신의 살이었고 민중해방의 꿈은 당신의 피였습니다.
그런 당신을 지금 이 부정한 시대에 보내드리는 심정 착잡하기만 합니다.
분단 이데올로기가 정치를 지배하고 대통령을 만들어내는 시대,
이 부끄러운 시대에 맞선 우리는 아직 먼 길을 가야하는데 깊은 지혜이자 산 역사이신 어르신을 보내드리자니 망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선생님 슬퍼하지 마십시오.
남은 우리는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라 다시 길을 나설 것이고, 남겨주신 높은 뜻을 기필코 계승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을 역사 속에 부활시킬 것이며, 역사의 주인은 바로 우리 민중이었음을 증명할 것입니다.
통일을 말하면 종북으로 몰고 평화를 외치면 간첩으로 조작하는 부정한 권력은
반드시 심판받을 것입니다.
당신이 그랬듯, 우리는 평생을 다해 분단권력과 맞설 것입니다.
통일은 자본가들의 대박이 아니라, 민중해방의 초석이며 노동해방의 동반자가 될 것임을 믿습니다.
생을 바쳐 당신이 치켜들었던 깃발, 이젠 우리가 부여잡고 갈 것입니다.
높은 곳에 가시거든 전해주십시오. 든든한 후배들이 있어서 떠나왔노라고...
그리고 지켜봐주십시오. 우리가 걷는 이 길이 역사가 되는 그날을...
부디 깊은 시름 내려놓으시고 영면 하소서.

2014년 4월 7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신승철
 
 
 
 

추 도 사
 
오늘 우리는 비통한 심정으로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 故 이종린 선생님과 유족들께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합니다.
조국통일 길에 아로새겨진 이종린 명예의장의 땀과 눈물을 기억하기에 그 애석함과 비통함은 더욱 크기만 합니다.
남북해외 3자연대의 구심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선생께서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조직 건설과 사수를 위해 모든 노고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셀 수 없는 투옥의 과정 속에서도 결코 놓지 않으셨던 선생의 남북해외 3자연대 운동에 대한 굳은 신념과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 노동자를 비롯한 모든 부문의 남북 연대교류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신이 걸어오신 길, 걸음마다 뿌려진 땀과 눈물이야말로 6.15시대 통일운동의 길을 열어낸 원동력입니다.
故 이종린 선생이시여, 지금 당신을 떠나보내는 길에 남북해외 모든 성원이 깊은 애도의 마음을 전하고 있을 것입니다.
박근혜 정권의 반통일정책으로 남북해외 민간 차원의 자유로운 왕래가 차단되어, 당신께서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북측본부, 해외본부 범민련의 모든 성원이 함께 할 수 없음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당신께서 그토록 사랑하던 노동자가 마지막 가시는 길 활짝 열어드리지 못해 죄스럽기만 합니다.
당신의 뜻을 이어가는 것이야말로 노동자 통일운동을 발전시키는 시금석임을 알고 있습니다.
조국통일 3대 헌장을 원칙으로, 6.15공동선언을 사수하고 이행하는 길에 노동자가 앞장서 나가겠습니다. 견결한 자주의 대, 투쟁의 대를 명확히 세우고 6.15 통일시대를 열어나가는 노동자로 살아가겠습니다.
부디 통일된 조국에 환히 부활하소서.

2014년 4월 7일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김동만
 
 
 
 
 
통일애국열사 이종린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선생께서 일제 식민지 조국에서 태어나 해방공간에서 청년기를 보내며 통일운동 애국운동에 몸을 바친 세월이 70년입니다. 미군정에 의해, 독재정권에 의해, 반통일세력들에 의해 수차례옥고를 치르시고 동지들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으셨지만 오로지 조국통일만이 우리 민족의 우리 조국의 살길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랬기에 선생께서는 범민련을 온몸으로 받아 안으셨습니다. 하지만 24년 범민련의 역사는 탄압의 역사였습니다. 남과 북 해외의 동포들이 조국을 통일하자고 만난 것이 그렇게 큰 죄였을까요? 1990년 범민련 결성 선포이후 역대 정권들은 국가보안법이라는 올가미로 범민련을 집요하게 탄압했지만 아직까지 범민련의 정신은 살아있습니다. 여기, 범민련의 정신으로 평생을 살아오신 이종린 선생님의 영정 앞에서 그 정신을 되새겨 봅니다.
칠순의 나이에 청년학생들과 통일선봉대를 이끌며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시던 모습, 정권의 탄압으로 폐허가 된 범민련을 지켜내기 위해 팔순의 노구를 이끌어 범민련의 깃발을 다시 세우던 모습. 평생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조국통일을 위해 싸워온 투사의 모습. 그것이 범민련의 정신 이종린 선생님의 정신이었습니다.
2000년 6.15공동선언으로 조국통일의 시대가 열렸지만, 10년이 채 되지 않아 6.15선언은 퇴색해 버렸습니다. 6.15선언 14주년이 되는 지금은 우리가 2014년을 살고 있는 것인지 1974년의 유신시대를 살고 있는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자주통일의 정신을 올곧게 가르쳐주고 이끌어 주셔야 할 선생님의 임종 앞에 황망할 따름입니다.
수많은 부침과 탄압, 아픔이 있었지만 조국통일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 앞에 놓인 사명입니다. 시대가 거꾸로 가도, 모진 고난이 있어도 조국통일의 사명을 짊어진 우리는 앞으로 전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은 이들이 먼저 떠나신 이종린 선생님과 선배투사들의 뜻을 이어받아 6.15정신으로, 범민련 정신으로 통일조국을 완성해 나가겠습니다.
유족과 범민련 동지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하며,
이종린 선생이시여 통일된 조국에서 부활하소서

2014년 4월 7일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 김영호
 
 
 
 
 
추 도 사

통일 애국열사 松石 이 종린 선생님!
한 평생 민족의 통일을 위해 힘쓰신 선생님!
외세에 의해 민족과 국토가 갈라져 고통을 받을 때
“분단의 나라에서 조국통일 운동은 더 없는 애국운동이라” 늘 말씀해 오신 선생님이시여~
이 썩은 세상에서 단언코 국가보안법을 인정할 수 없음을 밝히며 재판을 거부해 나서신 선생님이시여 그 큰 뜻을 다시금 머리 숙여 헤아려 봅니다.
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한반도의 통일만을 위하여 끝없는 투쟁에 앞장서시고, 조국의 하나 된 통일만을 갈망하며 온 몸 바쳐 헌신해 오신 우리 민족에 통일의 별이시여!
한평생 투쟁으로 이어오신 세월 어찌 한 맺힌 눈을 감으실 수 있단 말입니까?
다시금 평생을 염원하고 갈망하신 통일된 조국을 보여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민주 노점상 전국연합도 선생님의 뜻을 가슴속 깊이 받아 세기고,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두려울 것이 없는 부강한 조국을 건설할 수 있도록 선생님의 뜻을 이어받아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하여 그리고 조국통일 위해 끝까지 노력하고 투쟁하겠습니다.
한평생 분단된 땅에서 고생하신 선생님이시여~ 이제 편히 잠드소서! 살아있는 저희가 선생님의 편안한 안식을 위하여 투쟁하겠습니다.
 
2014년 4월 7일
전국민주노점상전국연합 위원장 김현우
 
 
 
 
 
영원한 우리들의 통일선봉대 대장 이종린 선생님께!
                             
선생님!
이종린 선생님!
우리들의 영원한 통일선봉대 대장 할아버지!
4월입니다.
참 좋은 계절입니다.
기나긴 얼어붙은 겨울을 이겨내고,
새싹도 올라오고, 꽃도 흐드러지게 피고,
사람들은 저마다 꽃놀이에 들뜨기도 하네요!
이 좋은 계절에 어찌하여 선생님은 이렇게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시나요?
아직까지 우리는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고,
선생님께서는 우리를 지켜보고, 가르침을 주셔야 할 일이 너무나 많은데요...
92년 불볕더위 속, 노태우 군사독재시절!
보름이상을 온 나라 끝에서 끝까지 ‘통일’을 외치며 내달리던 때가 벌써 이십년이 훌쩍 넘었네요!
지금 생각해보니 선생님은 그때도 칠십이 넘으신 시절이었네요!
<국가보안법철폐 선봉대> <주한미군철수 선봉대>로 나뉘어
동쪽으로, 서쪽으로 온 나라를 뛰어다녔지요!
8월초, 일천명이상이 같이 출발하여 8월 15일 역사적인 범민족대회를 할 때는 중앙통일선봉대 대원들 절반이상이 경찰서로, 병원으로, 뼈가 부러지고, 머리가 터지고, 눈을 크게 다쳐 실명까지 가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꾸역꾸역 대회장으로 모여들었지요!
참! 그때는 군사정권을 끝내고 통일조국을 안아온다는 뜨거운 심장으로 통일조국에 목숨바쳐도 좋다는 생각이 넘치고 넘쳤지요!
제 나이 그때 스물아홉이었습니다. 
심장은 뜨거워도, 연일 불볕더위와, 쏟아 붓는 폭우, 경찰들의 폭력 속에서 지치고, 주저앉고 싶을 때!  칠순이 넘으신 선생님께서는 늘 앞에 계셨습니다.
청년 이종린으로 늘 우리 앞을 힘차게 달리셨습니다.
어린 후배들을 격려하고, 함께 하자고 힘을 주셨습니다.
여성이 청년선봉대를 잘 이끌어 간다고 칭찬하고, 염려하고, 다독여주셨습니다.
그러고도 이십여 년이 흐른 지금!
여전히 우리는 국가보안법을 없애지도, 
주한미군을 철수 시키지도,
분단조국을 끝장내지도 못하고 이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그나마 우리민족에게 한줄기 빛이 되었던 6.15시대, 10.4시절도 꽃피우지 못하고
유신독재 시절로 시간을 거꾸로 돌려놓았네요!
얼마나 답답하셨습니까?
얼마나 원통하십니까?
선생님 평생, 청춘을 바쳐 분단조국을 끝을 내고 통일세상을 만드시려했는데...
어떠한 어려움과 탄압 속에서도 범민련과 3자연대기치를 포기하지 않으셨던 통일선봉대 대장 할아버지!
이제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지금보다 더 열심히, 더 치열하게...
선생님 못 이루시고 남겨 놓으신 과업! 저희들 뜨거운 가슴으로 받아 안고 한시라도 빨리 선생님 영전에 바치겠습니다.
다만, 억울하고도 분한 것은 선생님 살아생전 통일조국에 단 하루만이라도 사시게 했어야 했는데,
조국산천 구석구석 기쁨으로 다시 한 번, 한번만이라도 젊은 후배들과 뛰어다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선생님! 끝까지 저희들과 함께 해주십시요!
저희들을 지켜봐주십시요!
선생님과 함께 통일조국에서 영원히 살겠습니다.
부디 영면하십시요!!!

2014년 4월 7일
전국여성연대 상임대표 손미희
 
 
 
 

추 도 사
 
선생님의 뜻과 의지를 이어 자주, 민주, 통일세상 만들겠습니다.
이종린 선생님께서는 간악한 일제의 강점시기 조국 해방을 위한 투쟁에 헌신하셨고 해방이후에는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온 생을 바치셨습니다.
선생님의 삶을 돌아보며 지금 우리 청년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됩니다.
지금, 집권세력은 총체적 관권부정선거로 정권을 찬탈하고 영구집권을 위해 갖은 조작과 날조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또한 대북강경발언과 전쟁연습으로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으며,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깡그리 무시하고 통일은 대박이라는 허울 좋은 말로 일방적인 흡수통일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 모녀 자살사건, 조상만 철도노동자의 자살에서 드러나듯, 국민들은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민생, 평화통일이 사라진 한국사회.
청년들은 선생님의 뜻을 이어 민중들과 함께 자주, 민주, 통일 실현을 위해 앞장서겠습니다.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는 것은 그 분이 살아온 삶, 이루고자 했던 뜻과 의지입니다.
비록 선생님의 육체적 삶은 그 생을 다했지만 선생님의 뜻과 의지를 우리 청년들이 이어갈 것입니다.
이종린 선생님, 고이 영면하소서.
 
2014년 4월 7일
한국청년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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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